애난데일 소녀상과 워싱턴 평화의 소녀상 추진 멤버들.
2019년 10월 27일 미국에서 다섯 번째 소녀상, 도합 열네 번째의 위안부 기림비가 워싱턴 D.C.와 인접한 버지니아 주 애난데일에 세워졌다. 지역 정치인들도 대거 참석한 가운데, 한인을 비롯 궁금함에 나온 동네 주민들도 많이 참석한 큰 잔치가 치루어졌다. 오전 내내 내리던 비가 정오 무렵부터 개기 시작해서 마치 소녀상이 설치되며 위안부 피해자들이 소망했던 일들이 이루어질 밝은 앞날을 예시해 주는 듯 했다. 애난데일은, 소녀상이 존재하기 이전과 건립된 이후로 크게 구별되면서, 소녀상으로 인해서 애난데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될 것이다. 전세계에서 위안부 운동가, 학자들, 특히 기림비나 소녀상을 연구하고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네스크 시대의 성물을 가진 교회로 향한 성지 순례가 시작되며, 그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어서 유명해졌고, 상업적으로도 활성화가 되었던 것처럼, 소녀상이 세워진 애난데일은 이제 역사속에 당당히 기록되고 방문을 해야하는 중요한 도시가 될 것이다. 특히 한인들은 척박했던 애난데일 지역을 근면함과 억척으로 워싱턴 D.C. 근교의 가장 큰 한인타운으로 활성화시키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의 땀이 배인 그 도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고 세대를 이어줄 공공조각인 소녀상이 자리잡은 것이다.
오래전 지구의 반대편에서 일어났었던 성피해자들의 가슴아픈 이야기들이, 왜 21세기 미국에서 중요한 것일까? 무엇이 많은 재미동포, 다른 소수계 이민자, 유태인, 미국인조차 이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논의하고, 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만드는 것일까? 위안부 운동의 중요성과 의미를 애난데일 소녀상의 건립에 즈음해서 찾아보고자 한다. 다른 어떤 위안부 운동보다도 일본 우익이 거칠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그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 또 ‘평화의 소녀상(Statue of Peace)’이라는 이름은 왜 지어졌는지, 조각가의 의도는 무엇이었는지도 질문을 해 볼 가치가 있다.
소녀상의 기원
공공조각으로써 소녀상의 역사는 지난 2011년 서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중 당시 식민지로 있던 한국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의 어린 소녀와 여성들이 일본군의 전쟁 사기를 돋구고 지역의 강간사건을 예방한다는 명목하에 성노예로 끌려간 아픈 역사는 아직도 다 쓰여지지 않은 미완성이다.
위안부 운동을 시작했고 주도했던 정신대문제 대책 협의회(정대협은 정의연으로 현재는 명칭이 바뀌었다)이 지난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일본군 성노예 제도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일 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28년간 이어졌고, 세계 최장의 시위로 기네스 북에 올랐을 정도로 이 문제를 끈기있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외쳐왔다. 그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 후, 많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참석했지만 이젠 60대가 아닌 90대의 노구로 모두 병상에 있으면서도 참석을 이어나가고 있다. 수요 집회가 20년간 지속돼 지난 2011년 1,000차 집회가 되었을때, 마침 이 정신대 운동에 기여할 바를 찾던 김서경, 김운성 부부 조각가가 정대협과 협의하에 최초의 소녀상을 탄생시키게 된다.
그 이후 이 소녀상은 한국의 주요 도시는 물론,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미시간 사우스필드, 조지아 애틀란타, 뉴욕 맨하탄 등 미국의 주요도시 4곳에 세워지고 중국, 독일, 호주 등에도 세워졌다. 또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 앞으로도 세울 계획으로 있는 미국내 도시들이 있다.
소녀상의 조형적 상징과 의미
김서경 김운성 부부 조각가들은 이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조각의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들이 끌려가던 당시의 어린 모습의 소녀를 표현하기로 하였고, 대신 소녀상 뒤로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가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청동으로 조각된 소녀상은 원판이 있으므로 무한정 제작할 수 있으며, 높이 4 피트 너비 6.5 피트의 자그마한 인물상이다.
소녀상의 각 부분이 상징하는 바는 두 조각가 공저인 ‘빈 의자에 새긴 약속’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즉, 단발로 잘린 머리칼은 -당시의 전형적 머리는 댕기 머리였다- 부모로부터 급작스레 단절됨을 의미하고, 꽉 쥐고 있는 주먹은 명예와 권리 회복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다. 소녀 어깨에 앉아있는 새는, 이미 돌아가는 할머니들과의 매개체로 하나됨을 상징하고, 그림자에 있는 나비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환생이나 변성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피해자에서 운동가로 다시 태어난 -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나비는 불교의 나비춤이나 나비 장식 등 위로와 희망의 상징으로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쓰여왔다.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분인 김복동 할머니는 ‘나비재단’을 설립하여 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의 성피해자들을 돕고 있으며, ‘희망나비’는 전세계 위안부 운동가들의 로컬 집결체로 확산되는 등, 위안부 운동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소녀는 뒷꿈치를 바닥에 대지 못하고 들고 있는데, 과거나 지금이나 평화를 찾지 못한 피해자들의 심경을 표현한다. 소녀 곁의 빈 의자는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초대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초대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감과 동참의 자리이기도 하다. 동판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다는 운동가들의 다짐이 새겨져 있다.
공공조각이란 또는 넓게는 미술 작품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해석도 의미도 달리 적용되어 왔다. 유명한 피카소나 고갱의 작품들이 지금은 여성혐오의 산물이거나 식민주의적 표현이라는 해석이 새로이 나오고, 미 남북전쟁 영웅들의 조각이 인종주의자라고 끌어내려져 내동댕이 쳐진다. 소녀상은, 시대를 초월해서 인류 역사상 존재해 왔던 불합리함 즉, 권력구조로 인해 불가피했던,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는 힘 없었던 존재들의 항변이다. 보편적 진리에 대한 무언의 항변은 많은 대중들의 메아리와 외침을 불러일으키며 긍정적인 해석들이 보태질 것이다.
소녀상의 존재 의미
일본 대사관에서는 워싱턴 D.C.에 소녀상이 세워질까봐 계속 필자에게 전화를 해왔다. 4피트짜리 자그마한 소녀가 무슨 큰 해를 끼친다고 그럴까? 집요하게 묻는 일본 공무원에게 되물었다. 왜 그렇게 소녀상을 싫어하는지. 순간 대답을 못했고, 며칠후 긴 이메일이 왔다. 동료들과 상의하고 얻은 결론은, 이 소녀상은 일본을 깍아내리고, 두 나라의 화해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 답이었다. 두 가지 다 맞는 말이다. 이 소녀상은 전범자를 숭배하고, 미국 교과서에서 위안부 역사를 모두 지우라고 하고, 일본 교과서에서 2차 대전의 부끄러운 역사는 모두 지우는, 무엇보다 끔직한 범죄에 대해서 사과는 커녕, 오히려 당당히 거짓말로 비난하는 일본 우익의 파렴치함을 만천하에 영구적으로 드러내는 구조물이니 깍아내리는 격이다. 일본은 엄청난 자금과 로비력으로 역사를 왜곡하여 다시 쓰고 있다.
산케이 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역사 전쟁(History War)’라는 영어책으로 펴냈는데, 미국내 다양한 극우단체들과 더불어 위안부 운동이 일본인들을 깍아내린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일본계 또는 일본 위안부 운동가나 학자들은 위안부 운동이나 소녀상이, 일본 국민이나 재미 일본 이민자들에게 창피를 주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왔다. 예를 들면 에미 고야마같은 일본계 학자는, 소녀상 때문에 미국 학교에서 일본 학생이 곤욕을 치룬다는 극우파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단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화해는 반드시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요구 즉, 일본 국회를 통과하여 법적으로 결론 내린, 공식 사과와 국가적 차원의 배상 -독일의 경우처럼- 을 말한다. 일본 현 우익 정권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고, 할 의사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조각상은 불편한 것이다.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실 것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청동조각은 너무 항구적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것들을 기억해 낼때, 그래서 돌이켜 보며 행동으로 옮길 때만이 진정한 화해나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두 나라의 관계에 꼭 처리하고 넘어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운동가들이 표방하는 소녀상의 존재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메모리얼의 일반적 기능처럼, 할머니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의 용기와 인내심을 기리며 명예를 높이는 영구 조형물이다. 둘째, 지난 2007년 미연방 하원의원의 전폭적 지지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House Resolution 121) 핵심 내용인 ‘공식적으로 전쟁 범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메시지를 물리적으로 가시적으로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셋째, 여성 인권과 인간 존엄, 반전과 불의에 대해 대항하는 풀뿌리 운동에 대한 산교육의 자료를 대중과 차세대에게 제공한다. 인권 교육의 관점에서 이미 미국의 많은 대학교 학과에서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 국제 외교학, 문학, 한국학, 아시안학, 여성학, 미술사학, 인류학, 연극학, 영화학, 미디아학, 신학과 등- 위안부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워싱턴 건립 추진 위원회는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계속 제작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넷째,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지금도 사회 안에 벌어지는 성 불평등, 가부장제도의 모순, 여성비하, 성폭력, 인신 매매 등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예방에 힘쓸 것을 다짐하게 해준다. 이로 인해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진 도시에서는 주 차원의 또는 카운티 차원의 위안부 결의안이 종종 선포되어 왔다. 다섯째, 소녀상은 위안부 운동의 중요한 매개체이자 원동력이다. 28년이 되어가는 미국내 위안부 운동가들을 응집시키고 결속시켜준다. 위안부 문제에 헌신하는 운동가들, 교사들, 예술가들의 순례지가 되어서 영감을 줄 것이다. 이번 개막식만 해도, LA, 플로리다, 시카고, 필라델피아, 텍사스, 몬타나 등에서 위안부 운동가들이 방문하였고, 워싱턴 내의 위안부 관련 단체는 물론, 다른 단체들이 하나가 되어 연대할 수 있었다.
이번 애난데일 소녀상은, 워싱턴 희망 나비에서 시작한 소녀상 건립 운동을, 민주평화 통일자문위원회, 워싱턴 정신대 문제 대책위원회, 코윈 D.C. 챕터, 조지 워싱턴대 학생들로 구성된 SOUT(Shout out unspoken truth) 등이 모여 ‘건립 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워싱턴 정대위는 지난 2014년 버지니아 페어펙스 카운티 정부 청사 안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운 바 있지만, 더욱 강력한 전달력을 가지고 있는 소녀상을 건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힘을 합쳤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위안부 기림비의 공간은 진정한 인간 회복의 자리라는 것이다. 지난 2014년 페어펙스 기림비 행사 후 모두 떠난 그 자리에 남겨진 물품이 있는가 들렀었다. 당시 일본 미디아에서 많이 취재를 왔었는데 그 중 한 일본 여성 리포터가 기림비 근처의 나비 의자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우는 이유를 물으니, 처음 들어보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자기가 잊고 살던 본인의 상처, 즉 어릴 때 본인이 직접 겪은 성추행을 생각나게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들에 대한 감탄도 존경도 있지만, 본인의 상처를 누르고 잊었던 것을 처음으로 기억나게 해주면서 가슴이 후련하다고 했다. 불평등 구조 속에서 어린 소녀들이 당했던 과거는 어제의 이야기만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도 전세계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각성하고 교육하여 예방하고 더불어 각자의 상처가 회복되는 치유의 공간, 진정한 순례지(pilgrimage) -원래 정신적 육체적 치유를 얻고자 성물이 있는 곳을 방문하는 의식행위- 가 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마치는 말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회(School Board)가 위안부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소녀상 건립을 계기로, 페어펙스와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교육 커리큘럼으로 위안부 역사가 채택되고, 새로운 결의안 -메릴랜드는 이미 2015년에 결의안을 만든 바 있다- 이나 국제 연대가 이루어지고, 단체들 간에 결속도 다져지고 -이미 미국 전국 인신매매 구조 네트워크인 폴라리스 프로젝트 연대를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소녀상을 통해서 할머니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계속 외쳐서, 일본 우익 정부가 영향을 받고, 옳바른 방향을 찾기를 간절이 바랄 뿐이다. 더불어 원래 계획이었던, 워싱턴 D.C. 안에 더욱 영향력을 발휘할 이 지역 두 번째 소녀상이 세워지길 희망한다.
미국에서의 위안부 문제는 정대위가 결성된 지난 1992년보다 1년 전인 지난 1991년 와싱턴 한인 교회 여전도회에서 시작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여전도회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당시 시무하셨던 조영진 목사님께 “어떻게 정치적이라고 타부시 될 수 있는 사안을 교회 안에서 그렇게 허용하실 수 있으셨는지?” 라고 질문을 드렸을 때 -사실 목사님은 허용을 넘어서서 앞장을 서신 분이다- 목사님께서는, 기독교 교리가 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 빛과 소금이 되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말씀하셔서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지난 1991년에 미국 땅에서 시작된 위안부 운동이 전국적 지지를 받으면서, 지난 2007년에 미국 연방 하원에서 마이크 혼다 외 167명의 연방하원의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어, 재미동포 풀뿌리 운동의 승리를 최초로 기록하였다. 이제는 그 정신을 소녀상을 통해 되새기면서, 삶 가운데서, 결실을 지향한 행동 양식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매일 매일 실천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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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 ▲워싱턴 정신대 문제 대책 위원회 회장 ▲워싱턴 소녀상 건립 위원회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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