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량대첩 422주년 기념
▶ 기적의 승리 그 비결을 해부한다
10월 25일은 역사적인 명량 대첩 422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도대체 어떠한 마음으로 아무도 믿지 않았던 이 해전을 기획 강행하여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고 감탄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아무래도 그 해답은 충무공의 마음의 창(窓)인 어록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공의 어록 열 댓편 중 최고 수작 3편이 모두 이 해전 준비 과정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의 뿌리는 이순신 대신 통제사가 된 원균의 1597년 7월 16일의 칠천량 패전이다. 이때 조선 삼도 수군의 판옥선 160여척중 대부분인 150여척이 격파 당하여 사라졌다. 이순신 장군이 5 년에 걸쳐 피와 땀으로 구축한 조선 수군의 심장이 멎은 것이다.
초계(합천)의 권율 도원수 수하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이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듣고 통곡한 때는 이틀 후인 18일 오전이었다. 그리고는 어찌 할 줄을 몰라 안절부절 하는 도원수 권율에게 자기가 직접 패전 지역을 답사하고 대책을 건의 드리면 어떻겠느냐고 하여 허락을 받자 한시를 아껴 바로 그날 오후 군관 9명을 인솔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3일 뒤인 21일 패전 해역인 노량에서 옛 부하들로부터 ‘통제사 원균이 먼저 배에서 내려 도망치는 바람에 수군이 무너져 이 지경이 되었다’는 하소연을 듣는다. 길을 되돌려 진주 정개산 손경례의 집에 머물던 이순신은 8월 3일 선전관 양호로 부터 삼도수군 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고 공식 소임을 시작한다.
이후 내륙으로 하동, 구례, 곡성을 거쳐 옥과까지 북상했다가 다시 남행을 시작하여 승주, 순천, 낙안, 벌교를 거쳐 14일 보성에 도착 하여 3일을 머문다. 이곳은 명궁으로 이름난 장인 방진이 보성군수를 지낸 처가 마을인 연고로 주민들의 열렬한 환대와 지원으로 필요한 군수 물자의 많은 부분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 이곳의 유서 깊은 열선루(列仙樓)에서 15일 선전관 박천봉으로 부터 선조의 유지(有旨-임금의 명령)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유지의 내용은 어이없게도 ‘조선이 전함을 모두 잃어 싸울 배가 없는 마당에 어떻게 수군을 유지 하겠는가? 차라리 수군을 폐지하고 권율 수하로 들어가 육전에 참여 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제야 선조 임금이 제정신이 돌아왔는가? 사리로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임금이 미처 깨닫지 못한 국가 패망의 길인 수군 폐지를 절대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그 길은 일본에게 남해와 서해를 통한 군수품 해상 보급로를 활짝 열어 주어 망국에 이르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임금의 마음을 돌려 세워야 했다.
이때 장군께서 쓰신 반대 상소가 뒷날 바다의 간성인 해군 사관생도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바로 그 감명의 어록이다.
尙有十二 微臣不死 (상유십이 미신불사 - 우리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이나 되는 판옥선이 남아 있고 이 보잘것 없는 신하 이순신이 죽지 않은 한 싸워볼만하다)
이 어록의 진수는 160척 중 12척이면 ‘겨우’ 라는 표현이 정상일 터인데 이를 거꾸로 ‘아직도’ 라는 극단의 긍정법을 쓴 점이며, 어떻게 하던지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는 장군의 충정이 측은하게 느껴지지만 이 상소는 성공하여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다.
이후 장흥 강진을 거쳐 초계를 떠난지 꼭 한달만인 18일 땅끝의 작은 포구 회령포에 도착하여 고달픈 육상 행군을 마감한다. 이튿날 19일에는 칠천량 해전시 경상 우수사로 본대를 이탈하여 직할 선단을 이끌고 도망쳐온 배설로부터 온전하게 보전된 판옥선 12척을 인수 받음으로써 수군의 모양새를 갖추게된다. 이 12척이 명량해전 13척의 주력이 되어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으니 배설은 공로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제 버릇은 어쩔 수가 없었던지 해전이 임박 했던 9월 3일 진도 벽파진 진영으로 부터 다시 도망쳐 ‘도루왕’이 되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고향 선산에 숨어 살았으나 이순신 전사 이듬해인 1599년 초 도원수 권율에 체포 되어 참수 당했다. 그러나 이순신 보다는 오히려 서너달을 더 살아 임진왜란의 헷갈리는 ‘조커’ 라는 평도 듣는다.
이후 뱃길을 따라 서진 하여 이진에 도착 하였으나 장군의 속병이 도져 곽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인사불성으로 3일을 앓아 눕는다. 23일에 이진을 떠난 후 어란 장도를 거쳐 29일 다시 명량의 입구인 벽파진으로 옮겨 명량 해전 이틀 전인 9월 14일까지 약 15일을 머무른다. 어란에 적선 55척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받고는 다시 함대를 명량 수로를 지나 우수영으로 옮긴다.
해전 하루전인 9월 15일 일본군 300척이 명량 입구에 도착했다는 첩보를 받은 장군이 첫째로 내린 지시는 몰려든 피난민들에게 바다를 벗어나 육지나 언덕에 오르게 한 안전 조치였다. 그리고는 모든 장졸을 우수영 광장에 모으고 병법을 인용 하며 이와 같이 어려운 해전을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지녀야 할 강인한 정신적 자세를 힘주어 강조했다. 그리고 또한 명량이 지니고 있는 천혜의 지리적 잇점을 들어 숫적 열세를 겁내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고 분전 할 것을 촉구하며 이를 지키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임을 재삼 강조하였다. 지금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때라는 뜻이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 죽기로 싸우면 오히려 살 것이요 살고자 꾀를 부리면 오히려 죽게 된다)
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 - 한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을 막아낼 수 있다)
드디어 9월 16일 해전의 날 아침 10시경, 이순신은 무수한 적선이 명량을 지나 이리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곧 바로 함대를 이끌고 나가 우수영 앞바다에서 적을 맞았다. 그러나 곧바로 적선 133척에 포위 당하고 말았다. 이순신의 기함은 사력을 다해 분전했지만 부하 장졸들은 어제의 다짐과는 달리 열배나 많은 적세에 기가 질려 슬금 슬금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기함 홀로 적선에 포위된 채 한 시간 가량 고군 분투 하는 상황이 되었다. 기운이 다해가자 이순신은 깃발을 들어 부장들을 불렀다. 그러자 그들이 앞으로 나와 전투에 돌입 했고 다른 배들도 처음에는 겁을 먹었었으나 이순신 기함 단독으로도 적군에 포위된채 잘 싸우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어 공격에 가담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물의 흐름도 조선군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면서 적선 31척을 격파하는 기세를 올렸다.
이때 기함에 타고 있던 준사라는 일본 투항병이 비단 옷을 걸친채 바다에 떠 있는 일본군 시체를 가리키며 ‘마다시 마다시’ 외치는 것이었다. 마다시란 일본 해적 출신 수군 대장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별명이다. 이 말을 들은 장군께서는 즉시 시체를 갈고리로 끌어 올리게 한 뒤 뱃전에 올려 놓고 토막을 쳐 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적군의 기를 꺾는 심리전인 것이다. 마치후사의 형 미치유끼도 5년 전 임진왜란 첫해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전사 당했으니 우리 해안을 약탈 하던 왜구 두목 형제가 나란히 우리의 영웅 이순신에게 인과응보의 처벌을 받은 셈이다. 해전 결과는 일본군이 세끼부네 31척과 승선 인원 다수를 잃고 소득없이 후퇴한 반면 조선 수군은 판옥선 12척을 고스란히 보전 하는 완승을 거두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원균과 이순신의 리더십 유형을 보게된다. 한 사람은 자기 먼저 살겠다고 부하들을 버리고 치욕스럽게도 육지로 도망치다가 적에게 참살당했고 또 한 사람은 대장을 위험에 빠뜨리며 이탈한 부하들에게 자신의 훈령 ‘필사즉생’을 스스로 실천해 보임으로써 절대 열세를 대승으로 마무리 지었으니 그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순신 어록의 효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첫째, 필사즉생은 패전의 공포에서 벗어나 수군 전체의 강인한 정신적 자세를 촉구한 것이었지만 개전 초기 장졸들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 자신은 몸소 이를 실천하여 적군 중에 홀로 포위된 채 한시간 가까이 맹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 주어 이를 본 장졸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간접효과로 나타났다.
둘째, 일부당경은 영화나 작품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명량해전의 결정적 승리 요인은 바로 이 이순신의 회심의 지리전 전술에 들어 있다. 명량 입구에 도착한 일본 선단은 300여척으로 전해지며 그중 약 200척이 전투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 왜 전투력이 약한 소형 세끼부네 133척만 해전에 가담시켜 참패를 자초했을까? 그 해답이 바로 이순신의 ‘길목’ 작전개념이다. 일본군은 정유재란에 대비하여 조선의 판옥선을 능가하는 대형 전투선 아다케를 개발 하여 칠천량 완승을 거두었다.
명량에서는 약 오륙십척의 아다케선이 세끼부네 133척을 거느리고 명량 입구까지 도착하고 보니 명량의 수심이 1.9m 밖에 안되고 또 도처에 바위가 솟아 있어 배 밑이 첨저형(V)인 아다케 등 중·대형 전투선은 투입을 하지 못하고 소형 세끼부네만 들여 보냈다가 이순신 함대에 형편없이 깨어지는 모습만 보고 돌아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기적이란 없고 필연만 있었던 것이다.
이는 좁은 목 지키기라는 기발한 전술 개념으로 적의 전투력 절반 이상을 손도 안 대고 무력화시켜 우리의 10대 1 병력 열세를 거뜬히 극복하며 위기에서 끝내 나라를 구해내신 신의 경지에 이른 장군의 진면목을 보여준 사례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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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 / 이순신 숭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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