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는 관계이다. 어색한 긴장감 속에 겸양한 몸짓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우연히 같은 방향에 차를 세워 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같이 걷던 중 갑자기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시선을 강탈할 만한 눈부신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가 자기 차라 한다. 지난주에 새로 뽑은 차라 하면서 내 얼굴을 살피는 그분의 모습은 내 반응을 고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기대에 답을 해야 하는 의무감이 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반응이라는 것이 너무 과장되어서도 안 되고 너무 평가절하되어서도 안 되기에, 빨리 그 자동차의 사회적 수준을 간파해야 하는 내 마음은 아주 분주해졌다. 곧 그 차는 같은 차종에서도 가장 선택사양이 많은 상급 차종임을 알게 되었다. 조금 과장하면 그 차의 구맷값은 평범한 동네의 작은 단독 주택 한 채 값과 동격인 수준이다. 순간 옆에 서 있던 내 소형차가 불쌍해지기 시작한다. 그 초라함이 내 영혼까지 배고프게 만들려 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관념들이 도미노처럼 순식간에 뇌리를 스쳐 간다. 성공이라는 애매한 단어가 다른 사람에 의해 내 눈앞에서 현실화 되는 중이다. 그 성공을 과시하려는 고가의 실증적 존재가 나를 막 발가벗기려 하지만, 일방적 수용을 강요하는 이 이질적 존재감을 거부하기에 내 저항은 너무 미약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물결 흘러가듯 내 마음을 굴복시켜 버리면 곤란하다. 우선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세상이 나를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작업이다. 받아들이는 폭이 클수록 나는 세상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가 있다. 여전히 아이 같은 얼굴로 나에게 달콤한 수식어를 갈구하고 있는 그분의 얼굴이 다시 보인다. 내 마음은 다시 분주해진다. 그분은 자신의 성공을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어 하지만, 난 경쟁 사회 속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 짧은 시간에 결론을 내려 그분에게 안겨 드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어정쩡한 순간에 옆에 주차된 내 소형차가 또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 봤을 때 보다 더 천진하게 멀끔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철없는 고철 덩어리. 순간 생명 없는 자동차가 의인화되어 마치 내 자식처럼 느껴지는 터무니없는 감성에 빠져들게 된다. 그동안 세차도 제대로 못 해 주고 타이어는 심하게 닳아 있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오늘따라 더 궁색해 보인다. 생존을 위해 이곳저곳을 발품 팔아야 했던 나를 날라준 충성스러운 내 소중한 장난감. 갑자기 감정이입이 다발적으로 발생한다.
두 사람과 두 차종 간에 말 없는 4자 대화가 시작된다. 극히 짧은 그 순간, 행복의 조건들이 폭발적으로 내 인식의 범위에서 충돌하다가 마침내 난 소중한 결과를 얻게 된다.
‘차종의 귀천을 떠나자. 저 우쭐대는 승용차도 경솔할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소중한 결과물일 터이고, 그걸 인정하는 것이 곧 그분의 인생을 인정하는 것이겠지. 그 인생의 아픔을 격려하기 위해 기꺼이 그걸 각인 시켜 드리자! 그 말 한마디가 힘들게 살아온 저분의 삶을 기분 좋게 해 줄 것이야.’
‘비교’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가장 매력적인 독소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엔 그 독소가 늘 가득하다. 때론 그 독기는 치명적으로 영혼을 파괴해 버린다. 하지만 그 독소를 해독하는 완벽한 방법은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 평생 못 찾아낼 것이다. 살벌한 경쟁의 구도 속에 갇힌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남을 인정한다는 것은 겸손이라는 방법으로 표현되는 가면 같은 웃음일 수도 있다.
우리에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건 일종의 자아도취이며 따라서 자연스레 성취할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쉬운 방법을 그대로 타인에게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적용할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진실한 표현도 된다. 내가 나를 칭찬하듯, 내가 나를 사랑하듯, 그 이기적 자존감을 단지 대상만 바꾸는 심정으로 그냥 속아주면 된다. 이제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애타게 기다리는 그분에게 나의 입장을 빨리 표현해야 한다. 이내 내 소형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고급 승용차로 전가되어 눈먼 사랑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나의 입에선 탄성이 튀어나온다.
“야! 이 차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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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교 / 워싱턴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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