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지만 창밖은 푸르기만 하다. 키가 높이 솟은 팜추리의 푸른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고, 발코니에 내어놓은 화분들도 푸르기만 하다. 돌아보니 이렇게 푸른 가을 속에 살아온 것도 참 오래되었다. 처음엔 1년, 2년 세월을 보내며 어쩌면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이국의 삶이 벌써 은빛 기념일인 25주년을 넘었다. 그 적지 않은 세월을 보내면서 이 맘 때가 되면 늘 울긋불긋 단풍진 가을을 그리워했다. 지난 10년 동안은 거의 해마다 그 가을 속으로 날아가 머물면서 붉게 물든 가을을 만끽하기도 했었다.
올 가을에도 고국의 작가 창작실을 신청해놓고 단풍진 가을에 푹 빠져 지낼 계획을 세웠지만, 이런 저런 일들로 포기하고 나는 지금 캘리포니아의 푸른 가을에 있다. 무산된 계획에 안타까울 법도 한데 웬일인지 아주 편안하게 푸른 가을이 음미되어진다. 잎이 푸르러도 가을은 가을이라며 아침저녁 오소소해지는 기운에 스웨터를 여며본다. 이제는 내 앉은 자리가 편안해져 오는 세월 탓일까.
그래도 이 푸른 가을 속에 앉아 매일 고국의 뉴스에 귀를 곤두세운다. 끝나지 않는 정치 공방과 끊임없는 사건 사고 소식들. 내가 사는 도시의 소식들보다 멀리 고국 소식이 더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민 1세대라면 대부분 나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형제간이라도 정치이념은 다를 수 있어서 가족들과는 절대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는데, 삶의 동반자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 다행한 일이다. 뉴스를 보며 공감하는 시간이 저녁나절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나는 사실 정치 문제보다 오래전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특정된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그 끔찍한 사건을 생각하기도 싫다며 다른 뉴스로 돌려버리는 옆지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글쎄, 왜 나는 그 잔인한 사건을 자꾸만 생각하는 걸까.
사실은 옛날의 그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 일어난 다른 사건들을 포함해 인간의 악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이다 악인은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학습되어지는 것인가. 어떤 계기로 그들은 악인이 되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이란 이론으로도 대치되지 않는, 개인적 악의 성향에 대해 자꾸 유추를 하게 된다. 성악설을 믿는다면 성장과정에서 정화 받지 못한 탓이고, 성선설을 믿는다면 어떤 계기로든 악이 그들의 삶에 깃들여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어 죄를 짓는 사람을 악인이라 한다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자기들이 옳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다 선한 사람들인가. 알 수가 없다. 올바른 사람이 많아야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는데, 자기들이 옳다는 집회가 연이어 일어나는 고국의 광장 주변에도 단풍이 들고 가을은 깊어갈 것이다. 집회에 몰려든 사람들의 무리가 어른대는 화면은 내 눈엔 언뜻 붉게 물든 단풍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터지기 직전의 화농한 환부 같기도 하다. 오래전에 쓴 나의 졸시 한편이 있다.
상처가 많을수록 높이 오를 수 있다고/멍든 가을 푸르죽죽한 이국의 창 밖/여름내 맞아낸 매 자국이 단풍처럼 붉어지려면 아직도 먼먼 날이겠지/어서 붉어져야 빨리 소생하는 것들/엉거주춤 멍울진 것보다 붉게 화농한 고름주머니 터트리기 쉬운 법이니까// 단풍진 가을은/ 지나간 시간 속 기억뿐이네/돌이킬 수 없는 시공을 가로지는 법/ 내 안의 붉은 가을을 키우는 일, 창조하는 일/활화산처럼 타는 가을을 키우리라/죽을 것 죽고 살 것 살아나는 붉은 빛에 가벼워지는 영혼
시달림이 많았던 오래전 그 가을에 창밖의 푸른 잎들이 마치 햇빛에 매 맞은 멍 자국인 것만 같았고, 붉은 가을을 꿈꾸는 일은 파괴를 거친 생성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이 시가 생각난 건, 울긋불긋한 광장의 사람들이 어떤 방향으로든 새로운 생성을 가져다 줄 것이란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거기 그토록 술렁이는 가을 속에서도 지인들의 그림 전시회와 출판기념회 소식이 전해져 온다. 내가 참석 못할 만큼 먼 거리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식을 전해주는 그들이 고맙기도 하다. 행사를 앞둔 지인들과 고국의 광장에 내 기원을 날려본다. 진실한 열매를 맺는 가을이 되기를, 그리고 부디 좋은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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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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