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부쩍 느끼는 바지만, 나이가 들수록 졸리는 느낌이 자주 찾아 온다는 것이다. 육체가 쇠약해져 가니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물질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고 예전엔 애를 써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므로 생활에서 긴장이 풀린 때문으로 보여진다. 졸리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산다는 것이 그만큼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뜻하는 바지만 또 산다는 것이 그만큼 재미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같은 느낌이 나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성경에서도 가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富와 영혼의 상관관계는 결코 간과할 수만은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얼마전 ‘기생충’이란 영화가 한국 사회에서 천 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았으니 더욱 주목을 끌었겠지만 한국사회의 계층 구조와 갈등을 시니컬하게 파헤쳤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 작품이기도했다. 아무튼 ‘기생충’은 재미나 작품성을 떠나 본인이 중산층 이상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문제가 없겠지만 실제로 반 지하공간 같은 곳에서 세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다소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지나치게 비굴하게 표현한 모습에서 영혼이 없는 사회, 富의 허구성을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나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옹호라고나할까 변명같은 것이 북받쳐 오를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은 20대에 읽었던 가장 감동적인 작품 중의 하나였다. 가난을 풍자한 것은 ‘기생충’과 비슷하지만 가난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정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그렸다는 점에서 ‘기생충’과는 달랐다. 내용은 40대 초반의 어느 하급관리와 한 고아 처녀와의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는 형식으로 그린 것인데 내용은 단조롭고 심심하지만 평범한 이야기를 비범한 문체로 펼쳐나가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문장력이 천재적이다. 이 작품은 가난한 하급관리의 애환을 그린 고골리의 ‘외투’에서 영향받은 작품인데 ‘외투’가 스토리에 몰입시키는 작품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돈없어 천대받으면서도 문학을 사랑하는 저자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24세 때 발표한 작품인데 대문호의 출현을 예감시키는 진솔한 문장력이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하며 삶의 부조리, 불평등과 돈의 위력 앞에 인간의 품위가 얼마만큼 구겨질 수 있는가를 파헤쳐 평론가들을 감동시킨 작품이기도 했다.
가난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가령 ‘사랑해’를 말로 표현했을 때와 눈빛으로 표현했을 때가 다른 것처럼 가난이야말로 마치 칼로 무 베듯이 단도직입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가난은 빈곤의 또다른 표현이며 무소유의 의미, 특혜를 입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들이 많은 세상에서 가난하게 되라는 것 처럼 큰 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 입장은 달라진다. 가난하다고해서 또는 부자라고 해서 마음마저 모두가 가난하거나 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욕심에서 자유롭다는 뜻도 되지만 반대로 물질에서의 해방, 즉 부유한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부에 대한 갈망이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즉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거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려다 오히려 배신당하고 부자들에게서도 소외당한, 실패한 사회주의자라는 비판이 있는 것도 그들이 가난을 피상적으로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수가 말하는 가난이란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 즉 정신적인 여유로 살 수 있는 것이니 말인즉슨, 너희의 부함이 너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축복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갈망하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마음을 비우는데서 비롯되며 가난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편한 믿음의 상태, 천국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난한 사람들’은 문호 도스토옙스키를 있게 한 역사적인 소설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승화시켜 최고의 감동을 준 순수문학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로 일약 유명하게 됐지만 사실은 평생 돈때문에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른 말로 도스또엡스키야말로 가난을 팔아 명성을 샀던 당대의 기생충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오늘날의 도스토옙스키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이 주는 양면성, 그 저주와 축복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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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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