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노동을 하는 칼잡이 외과의사와 달리 입 노동이 주로인 정신과의사를 하며 습관이 하나 붙었다. 당일 진료할 환자기록부를 체크하여 생일이 가까워지거나 최근에 지나갔거나 하면 생일을 어떻게 지낼 건가, 또는 어떻게 지냈는가 물어 보는 일이다. 그런 물음을 대부분의 환자들은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서 그 뒤 편안한 마음 상태로 다음 대화를 이어 가기가 쉽다. 특히 골치 아픈 환자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윤활제 역할을 해준다.
생일이 오면 일년 동안 기른 머리털을 잘라 암협회에 기부하거나, 잊지 않고 미술관에 가거나, 카지노 노름판에 가거나, 여성환자는 장시간 샤핑하거나, 아파트에서 정신을 잃을 만큼 만취하는 독신 남성 환자, 홍등가를 기웃거린다는 젊은 남성 환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이렇게 생일은 우리의 전두엽을 자극시켜 평소와 다른 뭔가를 하고 싶은 충동을 준다. 어떤 일탈 행위를 해볼까하는 유혹에도 끌린다.
가을이 점점 익어간다. 소설가 까뮈의 말로 형형색색 낙엽 꽃들이 만발하는 두 번째 봄인 가을이다. 며칠 전 생일을 맞았다. 참 오래 산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님보다 28년, 아버님보다 15년을 더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귀가 순해져 남의 말 잘 듣고 세상일을 쉽게 이해한다는 이순 나이 후반부터 생일이 오면 두 가지를 하고 있다. 하나는 지나온 인생길을 반추해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두 가지 간단한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한여름이면 발가벗고 잠자리 잡으러 다니던 개구쟁이, 동네 말더듬이 흉내 내다가 말을 더듬게 된 초등학교 아이, 선친의 직장 때문에 타향으로 이사 가서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는 중학교에 합격한 수재(?), 김장철 가방 메고 돌아온 아들에게 배추 겉절이 한입에 넣어 주시던 어머님을 못 잊는 고등학생, 첫 만남에 가슴 졸이던 의대 졸업반 늙다리 청년, 태평양 건너와 아들 얻은 기쁨에 병원에서 춤췄던 칠푼 아빠, 그리고 쓴 글들이 책으로 처음 출간 되었을 때 흥분으로 상기되었던 중년남자의 얼굴 등이 활동사진처럼 스쳐간다.
곧 이어 끊겨진 필름에 다시 대학시험에 떨어져 코가 빠져 있던 재수생, 두 아들 대학 졸업식 때 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드리던 어머님, 처음 접한 환자 자살소식에 놀란 병아리 정신과의사, 먼 곳에 있다는 핑계로 아버님 임종도 못 지키고 상주 노릇도 못한 불효와 자책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늙은이 모습 또한 떠오른다.
이제 나이가 종심(從心)을 훌쩍 넘었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여도 법이나 규제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공자님 말씀처럼 살고 있지 못하니 아직 안 늙은 걸까? 나이는 객관적 나이와 주관적 나이(심리학 용어로 자각나이)로 구분한다. 더구나 장수시대의 새로운 나이 계산법으로 55세도 안되었으니 아직 노인이 아니란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니다.
환자들은 어떻게 살면 행복하냐는 질문을 자주한다.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라고(Mindfulness Life) 항상 조언한다. 그러나 실제 그렇게 살기란 매우 힘들다. 우리의 뇌세포 들이 그렇게 엮어져 있기 않기 때문이다.
뇌는 우리가 자라면서 주위환경으로 부터 보고 들은 과거의 경험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한다. 심리학 용어로 자동적 생각(Automatic Thinking)이다. 또한 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주관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오직 지금, 여기에만 집중하여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훈련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한다. 환자들에게 당신이 행복한 사람은 아니지만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말을 꼭 한다.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 고향 땅을 떠나는 목동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네가 세상을 두루 다니다가 알게 될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는 그래도 네가 태어난 시골 이곳에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Pilgrim)’ 초반부 어느 페이지에 적혀있는 글귀다. 그렇다, 진정한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여기 가까운 곳에서, 조그만 일을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생살이 싸움판에 절대적 승자와 패자는 없다. 상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가 깊이 연관되어 균형을 이룬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래도 삶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게 행복의 열쇠를 찾아 행복의 문을 여는 길이 아닐까 한다.
<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