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낳으려는 세계의 산통 소리가 점점 높아간다. 불안의 공기가 세계를 뒤덮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길이 치솟기 전에 설엉키는 연기와 같이 장차 오려는 위대한 시대의 예고에 지나지 않는다” 반세기 전, 함석헌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2019년 여름, 격변하는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다. 동북아의 긴장은 점점 팽팽해지고 세계 곳곳이 불안과 우려의 바이러스로 휘청거리고 있다. 특별히 주변국들과의 거미줄 외교 속에서 줄타기를 잘 해내야 하는 대한민국의 처지에 마음이 탄다. 사실 한반도를 끼고 도는 오늘날의 정세는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구한말, 조선 왕조사와 한국 근대사가 겹치는 시기… 그때도 조선은 열강의 각축전에서 생존 능력을 증명해야 했고, 믿을만한 내편 하나가 아쉬워 목구멍이 타 들어갔다. 대내적으로는 근대화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며 옳고 그른 것, 지킬 것과 버릴 것의 판단이 꽤나 혼란스러웠다. 풍전등화 같은 나라에서 여전히 관직에 나아가 입신양명의 꿈을 꾸어야 할지, 위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이나 독립군에 합류해야 할지, 대의명분은 접은 채 개화의 바람을 타고 살길을 찾아야 할지… 각자의 신념과 판단에 따라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했고, 무엇을 택하든 그 책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문득 그 격변의 시기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마침 한국 방문의 기회를 틈타 박물관들을 돌았다. 역사의 자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만나고 그 현장을 느끼고 싶은 기대감에 더위와 피곤도 잊고 정신없이 발품을 팔았다. 그런데 내 조상의 이야기가 궁금해 찾아간 자리에서 뜻밖의 동료들을 만났다. 무엇 하나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조선을 돕기 위해 대륙을 넘고 바다를 건너온 걸음들… 외국인 선교사들이다. 나 또한 20여년의 젊음을 아프리카에 묻고 온 선교사로서 그들의 사연에 폭풍 흡인력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 선교가 자유로운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선교사와의 접촉이 가능했다.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을 알린 것은 일본에 있던 한 조선 유학자의 애닮은 절규였다. “와서 우리 조선을 도와 주시요!” 선교 소식지에 실린 짧은 요청이 미국 사방으로 퍼져갔고 쉽게 응답할 수 없는 미지의 땅, 조선을 향해 누군가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양화진에 마련된 그들의 묘역을 찾아갔다. 각자 다른 사연이 적힌 묘비를 읽어가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로 엮어져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50대의 늦은 나이에 낯선 땅에 와서 불행에 방치된 여인들의 삶에 희망의 조명탄이 된 과부 선교사, 학대와 유린으로 인권의 벼랑 끝에 밀려 났던 노비와 백정들의 손을 붙잡아준 선교사,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며 심신이 쇠약해진 임금의 곁을 지켜준 선교사… 왕실에서 도살장까지 선교사들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꺼져가는 사회 곳곳에 희망의 불씨를 심은 선교사들이 조선을 무력화시키려는 일본의 눈에는 거침돌이 되었고, 마침내 일본은 조선땅에서 모든 선교사들을 몰아냈다. 한순간에 사회 곳곳의 지원군들이 떠나버린 조선은 다시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교사들이 떠난 자리를 조선인들이 지켜냈다. 선교사들이 불을 붙여준 조선의 미래는 조선인 스스로의 힘에 의해 꿈틀거리며 동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필두에 소개한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 다시 메아리 친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역사의 굽이마다 위기와 격변의 디딤돌을 딛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새움이 텄고, 절망이요 실패라고 닻을 내려 버린 그 배를 타고 희망의 대양으로 나아갔다. 동북아 끝에 매달린 작은 반도, 대한민국… 제 몸 하나 지킬 힘이 없어서인지,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탐내는 이가 많아서인지 예부터 지금까지 고난의 연속이다. 고난의 역사로 인해 쌓인 한도 많지만, 위기를 뚫고 솟아오르는 민족적 끈질김과 강인함은 고난 속에서 건져 올린 옥이 아닐까.
압박해오는 열강의 행진에 가슴 졸이던 한반도를 박차고 낯선 폭풍 속으로 몸을 던진 디아스포라 조선인들… 망망 대해를 넘어 신대륙에 둥지를 틀고 뿌리를 내리기까지 조선의 고난과 한 하나쯤 몸에 서리지 않은 이가 어디 있을까? 각자 사연은 다르지만 기어이 역경을 뚫어 오늘에 이르고 내일을 향해 ‘시간의 바다’로 나아가는 우리는 조선의 성정을 품은 한민족임이 분명하다. 디아스포라 한민족의 염원을 한데 모아, 금번에 당면한 위기 혹은 다가올지도 모를 더 큰 위기를 꼿꼿이 견디어 내고, 새 시대의 도약을 일구어 낼 고국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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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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