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워싱턴이라는 이름의 남자에 관한 것이다. -- 하지만 조지 워싱턴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본 딴 노예 해리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한번 탈출을 시도했으나 추포됐다.
해리는 마운트 버논에서 주인의 마필을 관리했다. 후일 두 번째 탈출에 성공한 그는 영국군에 가담해 주인이 이끄는 반란군 진압에 참여했다.
두 명의 워싱턴은 말 그대로 딜레마다. 한 명은 개인의 해방을, 다른 한 명은 국가의 독립을 추구했다.
필자는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인 질 리포어의 명저 ‘이것이 진실이다: 합중국의 역사(These Truths: A History of United States)’를 통해 해리 워싱턴에 관해 알게 됐다. 책의 앞부분은 노예의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다 -- 거듭된 반란과 처벌, 교수형과 화형, 참수의 기록이 전반부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당시 노예제는 그 이전과 달리 유별난 게 아니었다. 일부 남부주의 경우 노예제는 웨스트버지니아에 석탄이, 텍사스에 석유가 그랬듯 경제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는 노예제 없이는 상상조차 불가능했을 정도다.
미국의 백인들에게, 인종주의와 노예제는 우리 문화의 수면 바로 아래 잠복한 대단히 중요한 유산이다.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미국인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에 묘사된 노예제에 대한 미화와 찬양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동명 영화에서 여주인공 오하라의 충직한 하녀 피리시 역을 맡은 흑인 여배우 버터플라이 맥퀸은 “어머, 스칼렛 아가씨, 난 출산에 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답니다”라며 한바탕 수선을 피운다. (맥퀸은 후일 64세의 나이에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0개 부분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필자는 이 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없을 것 같다.
신세대 학자들은 노예제와 인종주의의 진정한 폐단을 똑바로 응시했다. 철저히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 같은 역사를 콜게이트 대학의 로버트 갈랜드는 ‘역사의 반대편(The Other Side of History)’이라 부른다.
이처럼, 우리는 최근 들어 귀중한 공화국의 형성과정과 거대한 부의 생산에 노예제가 담당했던 막중한 역할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리먼 브라더스, 조지타운 대학 등) 상당수의 미국 기업들과 기관들은 노예제도 덕분에 어마어마한 이익을 챙겼고, 목화와 설탕 산업은 온전히 노예들의 노동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리포어가 쓴 책은 ‘역사의 반대편’이라는 범주에 맞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턴과 기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노예들 역시 역사의 한 부분이다.
미국 독립혁명 동안, 수십 명의 노예들이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과 제퍼슨의 몬티첼로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영국군 진영으로 달아나거나 북부로 도주했다. 전쟁 막판에 30명의 노예들이 영국군이 포진한 전선을 향해 도주했는데 그들 가운데 15명이 도중에
사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 하버에서는 영국군 롱보트에 승선하려는 노예들이 필사적으로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리포어에 따르면 “이들은 붐비는 보트의 난간을 붙잡고 배에 올라타려 했다.” “그들이 물러서지 않자 영국군은 배의 난간을 붙잡은 노예들의 손가락을 절단했다.”
필자는 역사 매니아다. 정규학습 진도에 앞서 역사 교과서를 통째로 읽곤 했던 필자는 12세에 이전에 이미 재건시대를 무대로 한 하워드 파스트의 소설 ‘자유의 길(Freedom Road)’을 독파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묘사된 노예들의 행복한 모습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1950년대 초등학교 재학시절, 필자는 대부분의 노예들이 실제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배웠다.
미국 독립혁명은 그 자체로 노예제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었다. 만약 만인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면 어떻게 그중 일부가 노예가 될 수 있었을까?
제퍼슨과 워싱턴 등 일부 인사들은 죽을 때까지 노예들을 소유했다. 그런가하면 다른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신들의 용납할 수 없는 위선을 시인하고 노예들을 풀어주었다.
퀘이커 교도들 역시 대담하게 노예제도를 비난했다. 펜실베이니아의 발명가이자 현자로 (한때 노예들을 소유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노예제 폐지론자가 되었다.
우리와 역사는 어떤 관계인가? 우리는 우리가 이제까지 해온 모든 것들 그대로의 역사를 시인해야 한다.
역사의 표면에서 불과 한 삽 아래에 노예제가 놓여있고, 지금도 도처에 인종주의가 팽배한 상황임을 인정해야 한다. 마치 곰팡이처럼 인종주의는 역사의 지표면에 그대로 들러붙어 있다.
우리는 ‘~이자’ 혹은 ‘~이면서’라는 뜻의 편리한 연결 단어인 ‘and’를 적극 활용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노예 소유주이자 폐지론자였고, 인간을 소유물로 사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악했으나 동시에 대단히 선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안의 지극한 ‘선’이 ‘악’을 보상해야 한다.
필자는 보상이라는 개념에 반대하지만, 막대한 빚을 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돈을 빚진 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지식을 빚지고 있으며, 우리의 현재 모습이 노예제와 두 명의 워싱턴에 의해 틀지어졌는데, 그중 한 명은 노예였고 다른 한명은 노예주였으나 그들 모두 미국인이었다는 역사 인식을 빚지고 있다.
<
리처드 코언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총 2건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 빚은 백인들에게서 받아내기 바란다. 동양사람들에게서 받아내려고 들지 말고. 아시안이 봉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어떤 이들도 조금도 부끄럼 없이 아베를 편들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게 대한민국을 요즘처럼 ****** 양반제 없이발전하게 했지않느냐고 하는 이들이 이있는 걸 보면 이들은 아직도 일제시대에사는것 같은 정신상태라고 할수있다, 그리고 통일 없인 대한민국은 미 일 중 러의 눈칠보며 나랏일을 할수박에 없다하면 미국의 고마움을 모르고 미국을 배반한다고한다 난 미국에을 저주한적이 없다 내가사는 나라니 그저 잘못 돌아가는걸 이건아니라 했을뿐 내 자식이 잘못하면 야단 치는것 처럼, 내일을 생각하며 바른 맘으로 살지어다 하늘에 부끄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