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케이션(V-A-C-A-T-I-O-N),’ ‘사내들이 있는 곳엔(Where The Boys Are)’ 등 감칠맛 나는 카니 프란시스의 팝송이 한국에서 히트했던 70년대 초, 카니 강이라는 재미동포 처녀기자가 한국일보 본사 영자자매지 코리아타임스에서 한동안 함께 일했었다. 엊그제 LA 타임스가 보도한 강씨의 부음에 충격 받고 그녀의 반세기 전 희미한 기억들을 토막토막 떠올렸다.
나보다 한 살 위인 강씨는 미국 원어민이지만 한국말을 꽤 잘 했다. 자신의 한국 이름인 ‘견실’처럼 매우 건실했다. 뉴욕에서 기자로 뛰던 그녀는 한인 정체성을 고추 세우려고 혼자 모국에 왔다. 아버지 강주한씨(샌프란시스코 거주)가 코리아타임스의 홍순일 편집국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코리아타임스의 ‘타임스의 사색’ 오피니언란에 단골로 기고했었다.
한국 외국어대학에서 조교로 강의하며 신문사엔 비정규적으로 나와 잠시 일한 카니 강씨는 당시 코리아타임스의 최고참 여기자이며 사회부차장이었던 임갑손씨(현재 LA 거주)와 곧바로 가까워졌고, 두 사람 사이의 교분은 강씨가 지난주 췌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LA 타임스 기사도 “(강씨는) 마음 속에 심미안을 지닌 기자였다”는 임씨의 말을 인용했다.
강씨는 홍 편집국장의 권유로 ‘서울 회전목마(Seoul Carousel)’라는 타이틀의 고정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글 중에 공중목욕탕 체험담도 있었다. 미국에는 없는 적나라한 인간사회 풍속도가 재미있어 출근길에 비누며 수건 등등을 커다란 백에 챙겨 목욕탕에 자주 들른다는 내용이다. 좀 썰렁했지만 미국 신문의 칼럼들이 모두 그런 스타일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함경남도 함흥 인근의 단천이 고향인 강씨는 어려서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훗날 서울대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친 아버지의 영향 덕분이다. 그녀는 3살 때 아버지가 영어로 읽는 요한복음 14장 6절을 그의 무릎에 앉아서 따라 읊조렸다. 첫 영어공부였다. 단천에서 조상 대대로 수백년간 살아온 강씨 집안은 20세기초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 중 하나였다.
공산주의를 피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월남한 아버지 강씨는 2차 대전 종전 후 맥아더장군의 오키나와 사령부에서 일했고, 카니도 그곳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국제학교를 다니며 소녀시절을 보냈다. 그후 풀브라이트 교환학자가 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옮겨온 강씨는 미주리대와 노스웨스턴대(석사)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주류언론 최초의 한인여기자가 됐다.
뉴욕주 로체스터의 지역신문에서 취재기자로 출발한 강씨는 40여년간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와 크로니클 등 유력 신문들과 UPI 통신 및 코리아타임스 등 외국의 신문, 잡지에서 기자, 편집자, 해외특파원, 논설위원, 칼럼니스트 등으로 일하면서 각종 상을 30여 차례나 수상했다. 1997년엔 아시안-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로부터 평생 업적상을 받기도 했다.
강씨가 LA 타임스에 스카웃된 건 1992년이다. LA 타임스는 그해 4.29 인종폭동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인사회 취재를 맡길 능력 있는 한인기자가 필요했었다. 그 무렵 서울본사에서 파견 나온 나는 LA 영문판을 창간한 임갑손씨를 돕고 있었다. 강씨는 임씨 및 뒤에 영문판 책임자가 된 K.W. Lee(이경원)씨와 손 잡고 미주 한미 언론인협회(KAJA)의 창설을 주도했다.
코리아타임스 시절 강씨의 또다른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노총각들의 관심을 모았던 그녀는 뜻밖에 카피리더(교열담당)인 백인총각과 눈이 맞았다. 그 청년은 3선개헌을 앞둔 서슬퍼런 시절에 “박정희 대신 육영수가 출마하는 게 더 낫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가 정보부에 찍혀 한동안 피신했었다. 두 사람은 볼티모어로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오래지 않아 결별했다.
강씨는 자서전격인 ‘내 고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 한인가족 이야기’에서 “내 생각은 한인보다 더 미국인 쪽이고, 영혼은 미국인보다 더 한국인 쪽이지만 감정은 반반이다”라고 했다. 그게 이혼사유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2008년 은퇴 후 풀러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자격시험에도 합격했지만 고향에 교회를 세우려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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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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