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쯤이다. 당시 버지니아 주 맥클린에 위치한 한인 성공회교회에서 교양강좌를 실시했다. 조지타운 대학에 1년 정도 교환교수로 와있던 건국대학교의 신복룡 교수가 한인들을 대상으로 1주일에 한 번씩 다른 주제로 한국사 강의를 했다. 한국역사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온 나에게는 참 유익한 강의였다. 매번 두시간 정도 이어졌던 강의는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게 진행되었다. 여러 달 동안 매주 강의시간이 기다려질 만큼 명 강의였다.
신 교수는 미국에 머무르며 연구 활동도 열심히 했다. 연방 문서보관서에서 한국 역사에 관련된 자료들을 대거 수집했다. 1차 문서만 해도 1만5,000장 정도 복사했다고 들었다. 귀국 후 ‘한국분단사연구’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대한제국 멸망사’라는 제목의 번역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 번역서의 원작은 호머 헐버트라는 미국 선교사가 1907년에 출판한 ‘The Passing of Korea’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1886년에 조선에 와서 육영공원 교사를 지냈다. 1891년에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893년에 다시 조선에 왔다. 고종의 신임을 얻었던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때 이준, 이상설과 동행했다가 그 후 일본의 반대로 대한제국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는 한국이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던 중 여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시 마포구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는데, 그의 묘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의 땅에 묻히고 싶다”라고 써있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 헐버트 선교사가 외국인이라고는 믿어질 수 없을 만큼 한국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게 드러난다. 수천 년의 한국 역사 뿐 아니라 한국인의 풍습, 음식 등을 비롯해 동식물, 산업, 음악, 시, 예술, 문학, 건축, 화폐, 장례 문화 등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부분까지 상세하게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물론 책을 쓴 주 이유는 대한제국이 어떻게 망해갔는가를 적기 위해서였다. 강대국에 에워싸여 여기저기 줄타기를 시도하다 망해가는 약소국의 아픔이 그려져있다. 1907년에 책이 출판되었기에 한일합방까지는 적고 있지 않지만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헐버트 선교사가 기술한 을사늑약 체결 전후의 상황에서 고종이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러한 요청이 제대로 접수되지 않았을지 모르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있다. 그러나 헐버트 선교사는 오랫동안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대한제국과 미국 사이가 일본이 개입되었을 때 와해된 것에 대한 분노를 이 책 중간에서 짧지만 강렬하게 적고 있다. ‘공평과 정직’을 내세우는 미국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약자를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헐버트 선교사의 분노를 기억하면서 요즈음 고국이 처해져 있는 상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제국 말처럼 총칼은 아니지만 일본은 현재 경제적 우위를 무기삼아 한국을 협박하고 있다. 자유 무역이 국제사회 질서와 생존의 기본 원칙이 된다고 할 때 그 근간을 흔드는 행위를 일본이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과 그를 대하는 대한민국 정부 입장이 못 마땅하다면 외교적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경제와 무역을 무기로 삼겠다면 이는 과거 을사늑약 때의 총칼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슬픈 현실은 을사늑약 체결 전후에 미국 정부가 취한 태도가 대한제국의 독립국 지위 유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듯이, 이번 한일 간의 분쟁에도 미국이 별로 도움이 안 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이 된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가장 중요할 때 미국이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 무역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대통령의 중요 정책이 되어버린 미국이 사실 일본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럴 때 미국 내의 한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헐버트 선교사는 미국 정부를 강렬히 비판했는데 우리는 과연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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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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