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속내를 나눌 이웃도, 친구도 그리고 친정 식구도 하나 없던 이민 초창기부터. 나의 구차함을 친정에 말하는 것도 불효라 생각했고 친구에게 폭탄 같은 전화비를 설움에 털어버릴 수는 더욱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의견충돌이 있어도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는 남편이 있다는 것은 자존심과 상관없이 위로가 되었다. 그는 내 몸짓의 언어까지 읽고 감싸주던 사람이다. 책을 좋아한 우린 대화의 폭도 넓어졌고 서로에 대한 신뢰만큼 세상을 바로 보는 마음도 넓어졌다. 그는 진중했으며 깊은 심성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도 선했다. 우린 들어주고 말하는 역할을 번갈아 하면서 어려움의 연속인 삶을 지혜롭게 이어 나갔다. 가끔 다툼이 생길 때면 남편은 동네 바에서 대화를 유도했고 한두 잔 마시다 보면 화해가 되었다.
이민 생활의 고비에서 벗어날 때쯤 남편은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로부터 남편은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막내가 초등학생이고 큰애 작은애가 고등학생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간도 서지 않았던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이들이 학교 가면 산소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묻고 또 물었다.
그가 떠나고 온 첫봄 어느 날 축구 경기장 만한 산소엔 민들레 홀씨들이 너울너울 춤 추고 있었다. 티끌만큼 가벼운 그들도 춤추는데, 그 춤사위에 질투가 났다. 그때 “넌 볼수록 좋아지는 사람이라 나와 아이들은 행운이다.”라고 말하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그 말에 기운이 나면서도 앞으로 펼쳐질 무게감에 긴장되기도 했다. 삶의 속도가 남들과 다른 현실이 되었지만, 민들레 홀씨도 제 역할을 하듯 나도 남겨진 자 중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했다.
미국의 산소는 한국의 일반 공원과 비슷하다. 계절마다, 명절마다 또는 많은 기념일마다 묘 주변을 꾸미는 남겨진 자들의 손길을 받아 이쁜 공원 같다. 그곳에서 독백과 침묵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고백소에서 죄의 용서를 받는 것처럼 가슴이 아릿해 오면서도 후련하다. 날이 좋으면 그 둘레를 걷기도 하고 날이 굳으면 차 안에서 인사만 하고 올 때도 있다. 산소에 갈 때면 도착하기 전부터 마음속의 울분이 가라앉는 걸 느낀다. 나 왔어, 좀 더 있다가 가지, 하늘에서 힘 좀 써줘, 애들이 졸업했어, 그 손님 때문에 열 받았어. 등등의 말을 한다. 하지만 아직도 털어놓지 않는 말이 있다. 아이들의 실수들을 한 번도 말한 적 없다. 아이들도 가끔 아빠의 산소에 가는 걸 알고 있고, 실수에 대한 책임의 몫을 아는 아이들이기에 내가 먼저 위로를 받는 건 반칙 같아서다. 아이들은 나처럼 조잘조잘하지는 않아도 아빠의 묘를 바라보는 눈길에 모든 감정의 언어를, 그것을 아빠가 안다고 믿는다.
산소는 묻힐 때의 기억이 슬프지만, 이곳에 오면 재충전 된다는 것을 나도 아이들도 알고 있다. 이렇게 독백을 하며 15년이라는 세월을 큰 탈 없이 지낸 것은 아마도 내 속의 찌든 감정들을 담아두지 않고 쏟아낸 덕분이란 생각이 든다. 비록 예전처럼 답은 없지만, 말을 뱉어내고 침묵을 하다 보면 성찰이 되어가는 나 자신을 느낀다. 나의 독백은 내 귀를 통해 가슴속으로 들어와 똬리를 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성장을 보며 잘 버티고 있다는 감사함이 더 많다. 대부분 고백하기 전부터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 내가 결정한 해답을 확인하는 과정이 나로선 필요했던 것 같고 그 장소가 독백하기 좋은 산소인 것이다.
지금은 예전 같은 발걸음이 아니며 언젠가는 발길이 더 뜸한 세월이 될 것이다. 삶에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헤쳐가는 지혜를 독백을 통해 배웠으니 이 또한 감사하고 있다. 성년이 된 아이들이 산소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 Hi 아빠” 한다고 한다. 단순한 말 같지만, 의미는 묵직하다는 것을 겪어보니 알겠다. 먼 훗날 “Hi 엄마, 아빠” 하며 근처 고속도로를 지나칠 때, 그 한 문장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들의 가슴에 뭉친 감정의 근육이 조금은 풀릴 거라는 생각이 들기에 나는 오늘의 삶에 애정을 쏟지 않을 수 없다. 금전적으로 비빌 언덕이 되어주지 못하는 현실이지만 정신적으로 비빌 언덕이 사후에도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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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원 워싱턴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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