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그너를 처음 만난 것은 명동 필 하모니 음악 감상실에서였다. 그러니까 나의 바그너 성지는 바이로이트가 아니라 명동이었던 셈이다. 그곳을 왜 찾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명동의 화려함이나 목마른 ‘음악 감상가’로서의 지극한 정성 때문보다는 그곳의 어딘가 고답적이고 고리타분한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곳은 비록 주말에는 아베크족들이 꼬이는 아지트였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마치 패잔병들의 피난처… 오히려 한적한 절간 같았다. 어둡고 침침한 실내 분위기는 바그너 음악에 딱 어울렸는데 당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바그너의 ‘탄호이저’는 이 세상의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금 과장하면 마치 ‘수고하고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의 生音을 듣는 느낌같았다고나할까. 그러니까 그때 처음으로 바그너 예술의 세례(?)를 받은 셈이었는데 매우 엄숙하면서도 종교적이었던 바그너 예술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순례자의 합창과 같았다. 침울하면서도 내면적인 바그너의 예술은 중세 기사나 성지 순례객들과 같은 숭고함… 무한대로 향하는 깊은 인내의 감동을 주기도 하는데 실제로 바그너야말로 그의 예술을 수호하는 기사들(바그너협회 회원들 및 매니아) … 그리고 그만의 성지(바이로이트 축제 극장)를 거느린 지구상의 유일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불편한 진실이긴 하지만 음악이라는 장르에서 바그너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저주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그너의 음악이 친 나치주의 등 여러 논란을 낳았고 워낙 기형적, 과대망상(?)적으로 방대하여 이것이 도대체 음악인지 문학인지 철학인지 종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물체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바그너만큼 숭배받으면서 또 바그너만큼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인물도 없었다. 반 유대주의, 독일주의를 내세워 나치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인물. 그러면서 한편으론 유대인들과 친했고 또 나치가 가장 경계했던 인물… 바그너야 말로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예술가였으며 구도자, 방랑하는 화란인이었다.
바그너(1813-1883)는 자신의 작품이 일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는데 그것은 일반 오페라 극장들이 너무 시끌벅적했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유명해 지자 곧바로 바이로이트에 부지를 확보하고 지지자들의 후원금, 음악회 모금 등으로 자금확보에 나섰는데 예산은 부족했지만 바이에른 국왕(루드비히 2세) 등의 도움으로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의 준공을 볼 수 있었다. 바이로이트의 내부는 그리이스 극장처럼 계단식으로 설계되어, 어느 위치에서든 무대를 잘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객석 1천 8백석 규모로 소극장에 속하지만 워낙 음향이 뛰어나고 특히 바그너 자신이 직접 관여해 만든 무대의 독특성 때문에 바그너 팬들에겐 일생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순례지로 꼽히기도 한다. 첫 작품으로 링 사이클(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이 공연되었는데 당시 각국의 국왕, 귀족, 차이코프스키, 톨스토이 등 내놔라하는 유럽의 지성들이 모두 초청되었다고 한다. 바그너의 근본 취지는 예술을 통한 영혼의 정화였다. 베토벤이 기악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고 자신은 베토벤을 이어받아 음악에 극을 덧 입히는 사명 받은 예술가임을 자처했다고 한다. 음악은 언어(詩)의 시녀이며 시(劇)는 음악의 내조자로서 이 둘이 합하여 완성된 예술적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바그너는 자신만의 극장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이었다. 그러므로 바이로이트 극장은 단순히 극장이기에 앞서 바그너의 예술이 종합되는… 말 그대로 바그너 예술의 율법이 집행되는… 성지이도 했다.
바그너는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반 유대주의, 독일주의를 앞세워 이를 출세에 이용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독일은 다른 민족보다도 유전자적으로 우수하며 타 민족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반 유대주의의 칼날을 세운 나치는 이러한 바그너의 음악을 선전도구로 적극 이용했지만 ‘파르지팔’만큼은 공연 금지시켰는데 이는 ‘파르지팔’이 나치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간의 고뇌와 영적인 문제 등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바그너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일반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파르지팔’만큼은 오직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하도록 유언장에 도장을 찍었는데 유족들은 바그너의 유언을 이어받아 그가 죽은 뒤 30년간 ‘파르지팔’의 외부 유출을 일체 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 때 ‘파르지팔’의 신비감이 높아지기까지 했는데 박수도 금할만큼 근엄한 분위기의 ‘파르지팔’ 연주에서 오직 박수를 친자는 그 자신 뿐이었다고 한다. 바그너는 오직 인내 있는 자들만이 음악적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러나 그 신도(?)는 의외로 극소수일 뿐이었다. 그러나 추후, 인문적인 의미로서의 바그너의 예술은 그의 마지막 영혼 여행 ‘파르지팔’ 같은 구원의 마술피리로서… 지구상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바그너 성지 순례객들에게 꺼지지 않는 꿈을 안겨주고 있다.
<이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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