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골프코스에서 첫 홀을 끝내고 둘째 홀로 걸어가던 중 생긴 일이다. 갑자기 두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주저앉을 뻔 했다. 반사적으로 일어났으나 허리와 다리 근육이 땅기고 아팠다. 아픈 부위를 마사지 하니 좀 나아져 통증과 불편함을 참으며 라운딩을 마쳤다. 다음 날 부터 통증이 심해져 소염진통제를 복용했으나 별무효과였다.
의과대학 때 배운 것을 떠올려보니 허리 디스크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었다. 열흘 동안 기다린 뒤에야 겨우 정형외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진찰 결과와 MRI 소견은 노화과정으로 인해 척추 뼈들의 퇴행성변화가 진행 중 갑작스런 외부 충격으로 뼈 사이에 있는 디스크가 불거져 나와 신경뿌리를 눌러 통증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진료 받고 나서 일주일 후 척수 속에 스테로이드 주사(Epidural)를 맞고 곧 물리치료를 받기로 되어있다.
1990년대 초 이라크전쟁 승리로 인기절정이던 아버지 부시 당시 대통령의 재선은 차려놓은 밥상이었다. 그런 부시의 기세에 민주당 잠룡들은 꼬리를 내리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아칸소 주지사였던 촌뜨기 빌 클린턴이 출마선언을 하고 나왔다. 누가 봐도 돈키호테 같은 행보였다.
전쟁 후폭풍으로 미국경제가 점점 나빠지자 부시의 인기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나온 클린턴 선거구호가 ‘The Economy, Stupid(다 경제야, 바보야)!’였다. 이 짧은 구호 덕분인지 클린턴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우리는 희로애락으로 얼룩지고 굴곡진 삶의 순환주기 속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얼굴의 주름살과 머리 위를 덮은 하얀 서리가 나이를 말해주고, 운동신경과 감각신경 기능이 서서히 떨어짐을 경험한다. 친구들의 죽음 소식에 놀라고, 은퇴의 무료함 속에 가정적으로는 가장으로서의 힘이 빠지고, 심리적으로 자신의 한계에 대한 좌절, 실망, 분노, 자존심의 추락도 느낀다.
누구나 늙어서는 평안한 마음가짐과 조용한 삶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과 큰 부딪침 없이 살기를 원하지만 주어진 현실은 노인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노년기의 생활방식은 신체적 건강상태와 경제적 여유, 그리고 정신적 건강상태를 토대로 달라진다. 라이차드(Reichard)는 노년기의 적응양상을 5가지 패턴으로 나누었다.
지난 삶을 불운보다는 행운으로, 늙음을 현실로 받아드리는 성숙형, 등에 짊어졌던 삶의 무게와 불편했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해방감을 즐기는 은둔형, 자신의 출세에 지장을 주었던 일이나 사람, 환경에 대한 분노감에 젖어있는 분노형, 모든 실패와 실책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자책형, 그리고 늙음과 가까워진 죽음의 불안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무장형(방어형)이다. 방어형은 생각하기에 따라 긍정적이나 부정적 적응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있다.
주위의 내 또래 정신과 의사들은 벌써 세상을 떴거나 혹은 은퇴한 지가 오래 되었다. 나 역시 은퇴생활을 하다가 주어진 재능으로 조금이나마 봉사하고 싶어 파트타임 일을 작년부터 시작했다. 전자 의료기록의 어려움과 환자들로 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심했다. 가끔은 은퇴한 동료의사들한테 괜히 미안하고 혹시나 일하는 게 노욕으로 비치지 않나 하는 염려도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지난 반 년 이상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근처 공원에서 걷고, 조깅하고 375개 계단을 오르내린 다음 곧바로 헬스클럽으로 달려가 스트레칭을 하고 가끔 수영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프장에서 일이 생겼던 것이었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에 가벼운 지푸라기 하나의 무게라도 더하면 낙타 등이 부러진다(The last straw breaks the Camel’s back)는, 혹은 대형사고가 일어나기 전 일반적으로 작은 사고들이 선행한다는 완벽한 폭풍(Perfect Storm) 체험을 한 것이다. 문득 클린턴 선거구호가 떠올랐는지 ‘다 나이야, 바보야!’란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나는 라이차드의 적응패턴 어느 형에 속할까? 환자들한테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나 자신은 늙음에 대항해 싸움 닭 행세를 한 듯싶다. 그렇다고 너무 온순한 양이 되어버리면 척추 뼈의 퇴행과정이 더 빨라지기 마련이다. 할 수 없이 노년적응 패턴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5가지 각각의 좋은 점만 추려 만든 짬뽕형이다.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창세기 하나님의 말씀처럼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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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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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 서럽다는데 웬 유튜브광고. 이친구 정신병자아닌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