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브 강에 침몰했던 유람선이 떠올랐다. 마르기트 다리에서 추돌 사고가 난지 열하루 만이다. 6살 소녀는 할머니 품 안에 잠들어있었다. 생계를 위해 일만 하던 소녀의 젊은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어렵사리 나선 해외 나들이였다고 한다. 어린 생명을 포함한 3대 모녀의 죽음에 세상은 함께 울었다.
수년 전 방문한 헝가리 부다페스트. 그 날도 강바람이 싸늘했다. 그 강변에 서서 마르기트와 세체니 다리의 은은한 야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네오 고딕식, 국회의사당 건물의 조명 속으로 크고 작은 유람선들이 쉴새없이 빨려 들어갔다.
그런데 야경에 취하지 못했다. 왠지 마음이 시렸다. 여행의 들뜸은 어디 갔을까? 아마도 낮에 본 ‘다뉴브 강의 신발들’이란 조형물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차대전 때 강둑에 일렬로 서서 신발을 벗어놓은 채 총살당한 헝가리 유대인들의 잔상이 너무 찐하다. 60여개 녹슬고 구멍 난 신발들이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아니면 어디선가 들리던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때문이었을까?부드러운 강물의 흐름을 묘사한 왈츠 곡임에도 우리에게는 ‘사(死)의 찬미”로 알려졌다. 1926년 신여성 윤심덕이 도입부의 잔잔한 멜로디에 죽음을 예감한 가사를 붙여 슬픈 역사에 멍든 한국인들의 마음을 훔친 탓이다.
한 많은 한국인과 헝가리가 많이 닮았다. 숱한 외세의 침략으로 국토가 초토화됐고, 헝가리는 양차 세계대전으로 국토와 인구의 60%를 잃었다. 게다가 구소련 공산 압제 속에 국민들은 자조적 패배주의와 염세관에 물들어갔다.
그래서인지 다뉴브 강둑에 서면,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던 어린 날, 텅 빈 한강이나 낙동강변에서 맡던 쓸쓸한 바람 내음이 났다. 유럽풍의 건축물로 인해 처음엔 이국적인 느낌이 들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동양적 속내가 드러났다. 사람들도 서구인의 체형이지만 어딘지 동양인의 골상을 닮았다. 그래서 부다페스트는 모순의 도시다. 부다는 물을 뜻하고 페스트는 불을 의미한다고 한다.
동양의 뿌리와 서양의 얼굴이 겹친 곳이다. 누군가 한국과 헝가리가 같은 뿌리라고 말했을 때 처음엔 믿지 못했다. 그러나 헝가리 마자르(Magyar)족과 한민족은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임을 알았다. 마자르는 옛 말갈족의 후예. 이들은 아시아 유목민족으로 9세기 경 우랄 산맥을 넘어 유럽을 유린하고 다뉴브 강변에 정착했다고 한다. 용맹스런 기마민족으로 유럽 제국들은 이들의 침공을 막으려 훗날 신성 로마제국을 세울 정도였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한 뒤, 그 유민들과 함께 699년에 발해를 세운 한민족의 핏줄들이 아닌가.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후대 왕들에게 ‘고구려 정신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역사의 정설은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나 몽고, 만주, 한반도를 잇는 긴 우랄 알타이권의 기마 민족들을 같은 핏줄로 보는 것이다.
헝가리인의 또 한 갈래는 흉노, 즉 훈(Hun)족이다. 몽골 고원에서 살던 유목민족으로 유럽을 100년 간 지배했다. 453년 아틸라 왕이 병사한 뒤, 일부는 이곳에 정착, 마자르 족과 동화되었다고 한다. 1240년엔 몽고군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헝가리는 또 다시 동방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십수년 전부터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유럽 도시 들엔 삼성과 LG, 현대자동차 등, 기업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BTS 열풍이 영국에서부터 대륙 쪽으로 뜨겁게 불고 있다. 오랜 세월 후진국의 멍에를 벗고 첨단기술과 대중문화 양면에서 탱천하는 한국민들의 기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곳곳마다 한국 관광객들이 넘치는 것도 그 증좌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경제적으로 낙후됐지만, 헝가리도 옛 유목민 조상들의 기백과 중흥의 가능성이 심층에 살아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 텔러, 홀로그래피를 발견한 가보르 등, 노벨 수상자를 7명이나 배출한 창의적이고 우수한 민족이다. 그리고 냉전 당시 소련군에 맞서 수천명이 희생되면서도 치열한 자유화운동을 벌였던 민족이 아닌가.
이번 한국 관광객들의 죽음으로 한국민과 헝가리는 또 하나의 아프고 슬픈 인연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래에는 같은 기마민족의 뿌리, 두 나라의 국운이 날로 창대해져서 한강과 다뉴브강이 번영과 환희의 상징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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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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