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정치학 연구와 실증조사를 통해 새롭게 드러난 것은 유권자들이 항상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계층배반 투표’ 현상이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저소득층 복지와 사회안전망 확대에 적극적인 정치세력과 정당을 지지하는 게 지극히 당연할 것 같은데 실제 정치적 지지와 투표에서는 그렇지 않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어느 사회든 기득권층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소수가 사회경제적 재화와 권력의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선거는 권력과 재화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정치적 절차이다. 유권자를 구성하고 있는 계층별 숫자로만 본다면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고 해소하는 일은 이론상 상당히 쉬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선거를 통해 소수 기득권층의 특권이 정당화되고 강화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다수의 저소득 계층은 자신들의 경제적·계급적 이익에 배치되는 투표를 하고, 소수의 특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에 아주 충실한 투표를 함으로써 기득권 유지의 매커니즘은 계속 유지된다. 지난주 발표된 한국 갤럽 여론조사에서도 ‘부자 정당’으로 인식되는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저소득층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것도 백인 블루칼라 계층이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최근 미 언론에 보도된 기사 두 건은 이 의문을 푸는 데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점차 퇴락하고 있는 오하이오 북서부지역에서 트럼프 지지가 오히려 견고해지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기사이다. 공장들이 잇달아 문을 닫고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트럼프에 대해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보도는 아이오와 농민들 사이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는 AP통신 기사이다. 미국과 중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무역전쟁으로 아이오와의 농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다. 콩의 경우는 10년래 최악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트럼프에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두 기사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중국’과 ‘펀치’이다. 오하이오의 블루칼라들과 아이오와의 농민들은 트럼프가 지금 자신들을 위해 중국에 주먹을 날리면서 싸우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설사 경제적 어려움이 조금 따르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화답하듯 트럼프는 “우리의 애국자들은 지금 상황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트윗을 날리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일찍이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이면서 가장 보수적인 캔사스를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계층배반 투표와 관련한 가장 탁월한 분석으로 꼽히는 이 연구를 수행한 정치평론가 토머스 프랭크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경제가 아닌, 도덕과 종교적인 문제들로 돌리게 한 공화당의 전략이 잘 먹힌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투표와 정치적 지지는 당장의 경제적 이익 못지않게 정서적 욕구와 문화적 일체감 등 비경제적 동기들에 의해 크게 움직인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복지 못지않게 갈급해 하는 것은 자신들의 좌절감과 분노를 투사할 대상이다. 이런 욕구를 채워줄 대상을 던져주면서 곤고한 처지를 잠시 잊게 만드는 것이 보수의 아주 오래된 전략이고 이 전략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어왔다.
한국에서는 ‘빨갱이’와 ‘종북세력’이 이런 계층의 분노를 투사하는 대상으로 가장 빈번히 이용된다. 그리고 그 같은 시도는 그런대로 잘 먹혀왔다. ‘색깔론’이 보수 세력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레퍼토리가 되고 있는 이유다.
“유약했던 전직 대통령들보다 ‘싸움닭’ 트럼프가 더 좋다”는 저소득층 유권자들의 지지는 상당히 견고하다. 정서적 일체감으로 이어져있는 만큼 잘 흔들리지 않으며 실제 지지투표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약간의 ‘경제적 득실’보다는 ‘속 시원함’을 택하겠다는 밑바닥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안이한 자세로 접근한다면, 또 유권자들의 열망을 불러 일으킬만한 후보를 내세우지 못한다면 민주당의 2020 대선승리는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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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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