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아침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4년 만에 만나는 친구의 모습은 고즈넉하고 잔잔했다. 40년이 넘는 우정이었지만 우리가 미국 땅에서 만나긴 처음이었다.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친구들 모임에서 얼굴을 봤고, 더러는 나와 단둘이 만나 밥도 먹고 전철도 탔다. 뉴욕에 제 아이들을 유학시키던 때, 자신도 높은 토플 점수로 유학생 신분이 됐던 친구와 가끔 통화는 했어도 뉴욕과 캘리포니아의 먼 거리에 만나지지 않았다.
장미가 피어난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친구 부부와 마주 앉자 나도 모를 감격이 밀려왔다. 청춘에서부터 이 나이까지, 더구나 서로 먼 거리에 살면서도 끊기지 않은 우정에 새삼 지난 날이 뒤돌아봐졌다.
우리는 대학생활을 좀 특별한 기숙사에서 보냈다. 서로 다른 대학의 여대생들이 모인 명동성당 뒤편의 가톨릭기숙사 옆방에 친구가 살았다. 얼굴이 하얗고 몸이 가냘픈 친구가 어느 날 내 방의 문을 두드렸다. 저학년이었던 우리는 선배 룸메이트와 함께 방을 썼는데 마침 그때 선배는 외출 중이었다. 그날 나는 어떤 고뇌에 휩싸여 있다가 내 방을 처음 방문한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았고, 우리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숙사의 반찬은 채식이 많아서 음식을 가리는 내가 밥을 못 먹고 있으면, 친구는 김치와 가지나물을 밥숟가락 위에 함께 올려놓으면 맛있다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녀는 그만하면 지방 명문가의 따님으로 유복한 환경을 자랑할 만도 했는데, 그때도 소박한 식성으로 나를 일깨워주곤 했다. 졸업을 1년 남기고 친구는 아파트를 얻어 기숙사를 나갔지만, 그 뒤에도 끊임없이 연락을 해왔다. 졸업 후에도 늘 먼저 연락을 한 건 그녀였다.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친구 부부와 아침 식사를 하다 보니 맘에 걸리는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났다. 친구의 결혼식 날, 혼인선서의 증인이 돼달라는 그녀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게 새삼 미안해졌다. 친구보다 1년쯤 먼저 결혼했던 나는 그 즈음 시름시름 앓아누웠고 그녀의 결혼식에도 겨우 참석했다.
나중에 그 증상이 생명을 잉태한 징조였다는 걸 알게 됐다. 잘 나이 먹은 친구 부부를 보고 있자니 그때 좀 정신을 차리고 내가 꼭 그들 결혼식의 증인이 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집안의 의사 남편을 만났던 친구는 한세월의 삶을 잘 건사해온 듯 보였다.
바닷가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친구 부부의 렌터카는 나를 따라 산꼭대기 수도원에 도착했다. 귀한 시간을 내 여행을 온 친구에게 괜히 수도원이나 안내하는 건 아닌가 한편 걱정도 됐는데, 친구는 미사가 끝난 성당에 무릎을 꿇고는 일어날 줄을 몰랐다.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 걸까, 잠깐 헤아리다가 삶이란 아무리 풍족해도 아픔이 동반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삶의 아픔이라면 이민생활을 해온 내가 친구의 열배쯤은 겪은 일이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맘에 아릿아릿 아픔이 스몄다.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청춘의 그 시절보다 더 아름답게 보였다. 이제 우리는 긴 세월 살아온 삶을 발효시켜 스스로 가벼워질 나이에 이르렀는가. 친구 옆에 무릎을 꿇으며 나는 지금 내 삶을 얼마나 발효시켜 향기로 피워 올리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풍족하게 잘 걸어온 삶에도 결코 오만하지 않고,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는 친구의 수수한 모습이 새삼 뿌듯하게 느껴졌다.
나와 헤어져 친구부부가 렌터카를 몰고 여행하는 열흘 동안, 나는 그들이 달리고 있을 길을 날마다 헤아려 봤다. 구경은 잘하고 있을까, 길을 잃지는 않았는지, 긴 여행길에 아프지는 않은 건지, 괜히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그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마지막 문자엔 나도 모르게 맘이 허전해졌다. 잠시 같은 캘리포니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친구와 함께 보낸 듯했던 시간이었다.
친구는 고국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삶의 두께가 아른아른 겸손의 향기로 피어오르던 친구의 얼굴은 내 가슴에 새겨졌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이력을 얼굴에서 감출 수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내 얼굴은 지금 어떤 삶의 궤적을 보이고 있는 걸까, 새삼 거울을 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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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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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