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면 5월에 가정의 의미를 담은 기념일들이 많다. 유엔이 정한 세계 가정의 날(5월 15일)도 오월에 있다. 가정의 달 오월에 접하게 되는 안타까운 가정 붕괴 소식이나 각종 가정관련 사건 사고들은 유독 듣는 이의 마음을 배나 아프고 슬프게 한다.
오늘날 복잡한 국내외 정치 경제 상황이나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밀려 정작 가정에 대한 관심이나 정책이 소홀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저기 위기에 처한 가정의 힘겨운 모습들이 보인다. 위기의 가정을 돌보고 가정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야 말로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시급하고 중대한 일이다. 가정이 살아야 나라가 살고 사회전반의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이다.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자라고, 가정에서 삶을 마감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류 최초의 공동체로 가정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2:18) 이는 가정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 곧 인류의 삶이 시작된 자리임을 의미한다.
가정은 모든 관계(relationship)가 시작되는 곳이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 조부모와 손자녀, 친인척 등등 가정은 태어나면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의 결합체이다. 가정은 내가 누군가의 무엇이 되는 곳이며, 이렇게 맺어진 가족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원만한 사회적 관계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가정은 또한 친밀감이나 사랑 등 인간의 모든 감정과 정서를 경험하는 곳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헌신적 돌봄을 통하여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형제자매와 어울려 살며 우애를 알고, 식구와 함께 고락(苦樂)을 나눔으로 친밀함이나 슬픔과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인격이나 성격은 물론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나 태도 등등 인간의 됨됨이와 정서적 바탕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형성된다.
이뿐 아니라 가정은 인생살이에 필요한 교육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부모의 삶과 가정교육을 통하여 인내심, 근면, 너그러움, 양보, 정직, 용기 같은 도덕과 인성을 갖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마땅히 따를 길을 어려서 가르쳐라”는(잠언 22:6) 성경 말씀은 가정이 교육의 장소임을 말해준다. 조선 후기 문신인 무명자(無名子) 윤기의 ‘사랑만 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짐승으로 기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을 담은 “애이불교(愛而不敎) 수축지야(獸畜之也)”라는 글귀 또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칸트 역시 부모를 일컬어 ‘자식을 바르게 길러 미래를 조금씩 진보하게 하는 사람으로’ 말한 바 있다. 그는 부모의 의미를 교육자요 미래를 진보시키는 자로 확장하였다. 부모의 가정교육 방향이 가문의 영광이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넘어 세계의 시민을 기르는 데로 모아진다면 그 부모는 가히 미래를 진보시키는 부모요 참교육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가정은 가족들이 세상으로 들고나는 인생의 모항(母港)이며 동시에 거센 세파를 막아내는 최전선이기도 하다. 가정은 세상을 만나고 체감하는 곳이다. 세상의 환희와 역사의 아픔은 가정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간다. 사회의 모순이나 정의의 실종은 곧 가정의 아픔이 된다. 6.25전쟁, 5.18 민주화운동, 천안함 사건, 세월호 등 역사의 질곡이나 사회적 아픔을 가장 고통스럽게 그리고 가장 오래 받아내고 있는 곳은 가정 곧 희생자들의 가족들이다.
이처럼 가정의 의미는 참으로 심원하다. 가정은 삶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곳이고, 진선미와 사랑의 삶을 추구하는 신앙이 형성되는 곳이며, 세상사에 지친 가족들이 한 지붕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격려와 위로를 받아 다시 용기와 희망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정은 하느님께서 인류의 첫 공동체로 세워주신 행복 공동체다. 천륜으로 맺어지고 인성과 도덕 곧 인륜이 형성되는 곳이다. 비록 때로 힘들지라도 가정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의 모든 가정이 사랑과 헌신으로 가족을 돌보고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세상의 고통과 아픔도 가족애의 힘으로 헤쳐 가며 이 땅에 ‘작은 천국’을 만들어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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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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