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로 ‘인간관계’의 상징과 뜻을 풀이하는 한국인을 예를 들면 한국인의 독특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다. 여기서 ‘인(人)’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으로 인간관계에서의 의존성과 상호성을 상징하고 ‘간(間)’은 무엇과 무엇의 사이라는 뜻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를 상징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습성 중 하나로서 유교적 가치관을 들 수 있는데 지체가 낮거나, 신분이 남만 못하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지켜야 할 예절을 요구받게 된다.
한국의 전통가치와 사상이 두드러지는 특성은 권위주의를 지향함에 있다. 인간관계, 그리고 사회적 윤리는 엄격하고 철저한 상하의 서열관계를 기본원리로 되어 있고 한국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위아래가 엄격히 종적인 관계, 즉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형성돼 내려왔다. 양반제도에서부터 모든 직업과 신분제도가 조직적으로 굳혀져 있었던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런 습성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군(君)―신(臣)과 부(父)―자(子)와의 관계구조와 같이 신하는 임금에게,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서열구조가 사회 속에 자리 잡아 복종을 해야 하는 대상들―신하, 아들, 여자는 상대적으로 억압받는 약자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약자들의 억압된 의식과 내면적 갈등 속에서 우리만의 대표적 정서로 손꼽히는 것이 ‘화’와 ‘한’으로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동양의 서구화와 근대화가 이뤄진 지 오래되었으나 예로부터 내려온 관계구조로부터의 억압과 화, 그리고 한은 한국인만이 지닌 특정질환이 돼 버렸다. 여기에 한몫을 하는 것은 바로 한국사회가 겪은 잦은 전쟁과 불안정한 사회구조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화병 또는 화증은 1996년에 국제정신의학계에 가장 한국적인 신경장애증상으로 정식적 등록이 되었고 한국사회에 토착화된 사회문화 기류의 정신의학적 성향으로 비친다. 화병의 화(火)란 불을 뜻하는데, 그 뜻 그대로 불이 나는 것과 같이 내면의 분노가 속에서 화산처럼 이글대는 듯이 언제 터질지 모를 위험한 상황을 나타내는 병을 말한다.
과거 ‘화병’과 흡사한 맥락으로 ‘화증(火症)’이라는 용어가 있었는데 조선 정조의 모친이며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병세를 언급할 때 자주 사용했다. 화병에서 ‘화’는 한의학에서 일종의 한국인 고유의 스트레스의 표출이라고도 한다. ‘화병’이라는 병명을 한의학의 전통문헌에서 독립된 질병으로서 다뤄진 적이 없으므로 한자를 쓰지 말고 순수한 한국 우리말로써 화병이라고 부르자는 한의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했을 정도로 화병은 고유의 한국인의 심정을 표현하는 용어로 주장되었다.
이제 ‘Hwabyung(화병)’은 국제 언어―분노의 억압 때문인―로써 거듭났다. 외국에서는 비슷한 보기라도 찾아보기 힘든 가장 한국인다운 마음의 병으로 인식되었다. 서양 심리학에서 말하는 문화적 증후군이 한국에서는 단순히 화병으로 비춰지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심각하게 경계선 인격장애로 판명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문화적 증후군이란 문화적인 현실이 극단에 처했을 때 어떤 양상을 취하는지를 직접 보여주는데 다인류학자의 비유에 따르면 ‘문화적 증후군은 문화적 환경으로부터 온 고통의 특질’이라고 한다.
화병에 대한 국내외 관심과 연구가 198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 의료원의 한 정신과 의사가 한국인 교포 여성들을 중심으로 치료한 결과 한국인이 지닌 화병이 한국의 문화연계증후군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미국 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하면서부터 갑자기 활발히 진행됐다.
화병은 한국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집단적 문화중심에서 비롯된 독특한 문화적 심리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화병은 뚜렷한 증상을 지니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인체의 평형상태가 깨지면서 생기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답답함, 치밀어 오름, 몸이나 얼굴에 열이 나는 느낌 등을 자주 느끼게 된다. 또한, 순환기관이나 소화기관 등과 연관된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화병환자들의 특성을 보면 삶을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막상 그들은 ‘내가 참아야지’라고 무기력한 반응을 보이는 게 보통이다. 이렇게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지고 회피적이고 수동적인 성향 때문에 병은 점점 곪아가고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심리를 치료하는 치료사는 이렇듯 내면에 오랜 세월 묵어 세대를 걸쳐 온 부정적 정서의 ‘한’을 절대로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한국의 민족성을 내포하고 있는 ‘한’은 그 자체를 분출하지 못하면 앞서 말한 ‘화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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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윤선 <미술치료 전문가,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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