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가끔 비라도 쏟아졌으면 하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은 대체로 자기 중심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그런 피해의식 때문이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할 때,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이런 저런 마음의 실타래가 얼키고 설켜 가슴 한 쪽을 박박 긁을 때, 비라도 억수로 쏟아져 세상이 온통 무의미해진다면 방구석에 홀로 틀어박혀 자기만의 숨 쉴 공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라도 (한차례) 쏟아졌으면 할 때, 나는 가끔 비제의 음악을 듣곤한다. 왜 비제일까? ‘카르멘’에 나오는 3막의 전주곡 ‘아를의 여인’ 중 미뉴엣 등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은 밝고 맑은, 청아한 무지개로 가득 채워지곤한다. 진솔하면서도 깊이 있고 깊이 있으면서도 다감하며 다감하면서도 찡하게 울리는 그런 글이라도 읽는 듯 하다고나할까? 예전에 샘터라는 잡지를 탐독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추어의 글들로 가득 채워진 책이었다. 하나의 글, 아니 책이라는 것은 나에겐 적어도 그런 것이어야 했는지 모른다. 마치 하나의 음악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펼쳐보면 그 속에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여름날의 참외밭, 오두막 위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영혼을 촉촉히 적셔주는 아름다운 무지개…
글은 과장없이 자신의 생각을 적어나갈 때 감동을 준다. 물론 모든 글이 그럴리는 만무하다. 글을 쓴다는 것, 작곡을 한다는 것, 혹은 무언가를 영감받는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할 수 있는 빵굽는 기계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 영혼에 몰아닥치는 고뇌, 그런 알 수 없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가 힘들게 예술을 추종하는 것도 마음의 번뇌를 내려놓기 위한 정신 수양도, 교양을 쌓기 위한 지적인 놀음만도 아닌, 다른 사람(예술가)의 고통을 통해 영감을 훔쳐내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인지도 모른다.
비제의 음악에는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어딘가 아마추어적인 신선함… 기교보다는 진솔함으로 승부하려는 뚝심… 초연함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기본에 충실하려는 그의 음악적 자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오페라 ‘카르멘’은 초연 당시 참담한 실패를 겪고 말았다. 원색적이고 도발적이며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웠지만 너무나도 대중과는 거리가 먼 그런 부담감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카르멘’은 동시대에 이해 받기에는 너무도 앞서 간 작품이었다. 비제가 죽고 난 뒤 비인에서 재 공연하여 격찬 받았지만 그것은 예술가가 죽은 난 뒤 그림 값이 올라가는 식이었다. 너무도 실험적이었고 당시로선 고집이 센 황소와 같았던 작품 ‘카르멘’의 객관적인 실패 요인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카르멘’은 원래 프랑스의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이었는데 글 속에 횡포한 인간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절찬받은 작품이었다. 특히 스페인적인 이국 취향을 발랄한 색채로 그려 선배 스탕달과 비교되며 조명받았는데 소설의 내용은 기병대 돈 호세라는 군인이 집시 여인 카르멘에 홀려 종국에 가서 인생을 망친다는 내용. 전형적인 팜 파탈 이야기로서, 비제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 졌는데 이 오페라는 작품성의 여부를 떠나 극의 선정성 때문에 막장으로 찍혀 4막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객들은 자리를 뜨고 말았다고 한다. 1875년 3월 파리 코미크 극장에서 있었던 일로서, 당시 파리 오페라 계는 청순가련형 여주인공들을 앞세운, 그랜드 오페라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당시의 오페라는 현재의 영화관처럼 온 가족이 나들이 하는데 주로 이용되는 곳이어서 당시로선 외계인 취급받던 집시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모자라 살인으로 막을 내리는 막장 영화를 선보인 것은 너무도 지나친 파격이었다고 한다.
파리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같은 해 (비제가 사망한 뒤) 비인에서 재 공연, 절찬 받게 되는데 비인의 성공을 계기로 런던, 벨기에, 러시아, 뉴욕 등으로 진출 세계적인 레퍼토리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특히 바그너 오페라에 염증을 느끼던 니체 등의 극찬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작곡가이며 지휘자였던 R. 슈트라우스은 꾸밈이 없고 순수한 ‘카르멘’에 대하여 ‘오케스트라의 교과서’와 같은 위대한 작품이라며 칭송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비제는 ‘카르멘’의 실패로인한 과로, 스트레스 등으로 37세의 나이로 한많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비제의 음악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좀 어두웠으며 과장이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 외롭고 쓸쓸한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천재를 조명받지 못하고 요절하게 될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삶은 누구에게나 빈자리가 하나씩은 있기 마련인지 모른다. 꼭 있어야할, 그 부족한 빈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인간은 누구나 노력하고 예술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노래할 테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꽃피는 봄이 봄같지 않았을 ‘카르멘’의 실패야말로 비제에게는 악몽이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5월에 듣는 카르멘이 더욱 매혹의 향기가 되어, 인생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올 6월, SF 오페라의 여름 페스티발 작품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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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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