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엔 언덕 위에 아름다운 도서관이 있다. 대충 집안 정리를 끝낸 정오 무렵이면 나는 자동차에 노트북 가방을 싣고서 도서관이 있는 언덕을 향한다.
언덕을 오르는 길 중간쯤엔 파란 우체통이 하나 서 있다. 웬만한 연락이나 공과금 처리도 다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요즘, 언덕길에 덩그마니 선 우체통은 좀 쓸쓸해 보인다.
그 우체통 옆을 지나쳐 갈 때면 문득 손 편지를 길게 써서 누군가에게 부치고 싶은 충동이 인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파란 우체통에 편지를 넣은 내 모습을 상상하면 봄꽃 향기와 함께 그저 막연한 그리움이 어디선가 불어온다.
도서관 주차장에 한창 만발했던 보라색 등꽃은 이제 지고 있다. 넓은 주차장 군데군데에 세운 꽃 벽에 보랏빛 주렴처럼 피어났던 등꽃은 나를 오래전의 기억 속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등꽃이 피어나던 집에 살던 때가 있었다. 열여섯 살 소녀였던 나에게 마당에 핀 등꽃은 꿈이 가득한 숨을 불어넣었다. 그때 터져 나오던 감수성을 참을 수 없어 썼던 시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생각하면 삶이란 것이 어떤 형태로도 아프다는 걸 모르던 시절이었다.
5년 전쯤 새로 지었다는 이 아담한 도서관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언덕 아래 푸르름과 들꽃들, 멀리 한적한 길을 달리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더 멀리 산등성이는 아스라하고, 창가에 선 키 큰 소나무는 바람에 가지를 흔들며 뾰족한 잎들을 올올이 춤추게 한다. 그렇게 언덕의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다 보면 마음이 청신하게 씻기는 것만 같다. 야생풀과 들꽃이 어우러진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흰 구름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속의 온갖 것들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창밖에서 흔들리는 것에만 시선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붉은 지붕의 집들이 모여 앉은 곳보다는, 산등성이보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지 않는 때는 나도 모르게 멀리 길을 지나는 자동차를 바라보고, 언덕 아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새삼 정지된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고 생각한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작은 골짜기도 이러할진대 저 높은 곳에선 정지된 인간보다는 많이 움직이는 인간을 사랑하실 거란 생각을 해본다. 그날이 그날 같은 삶을 사는 사람보다는 질풍노도와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신은 더 눈길을 주리라는. 그런 생각에 이어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는 고통과 시험은 피할 수 있을 것이나 배움을 얻을 수도, 느낄 수도, 변화할 수도, 성장하거나 사랑할 수도 없으므로, 확실한 것에만 묶여 있는 사람은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와 같다. 오직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
자넷 랜드의 ‘위험들’(류시화 번역)이란 글의 한 구절이다. 아픔도 슬픔도 아무런 굴곡도 없는 삶을 원하는 건 누구나의 소망일 것이다. 나 또한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가슴이 씻기는 듯한 치유를 경험하면서도, 결코 그렇게 흔들리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는 글들이 사실은 허구의 삶들 흔들림인데도 정작 나 자신이 흔들리고 싶지 않은 건 이율배반적인 일일까.
백인들이 주로 사는 이 동네 도서관엔 한국 책이 꼭 70권 꽂혀 있다. 수천 권의 도서가 정비된 이곳에 오직 70권으로 외국어 섹션 한쪽을 차지한 한국어 책이 이 곳 한인 거주 비율을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반가워서 한 번씩 그 한국 책들을 어루만져 본다. 국민작가의 책도 있고, 더러 안면 있는 작가의 소설도 있어 그를 만난 듯 책을 꺼내 펼쳐보기도 한다. 어쩌면 이 한국어 책들도 언덕길에 홀로 선 우체통처럼 조금 외로운 느낌을 준다. 대부분 영어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노트북의 한글 자판을 두들기는 나도 그러하다고 생각하며.
도서관 창가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파란 우체통은 또 홀로 서 있고 바람에 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 더러 떨어져 내린 꽃잎이 차 지붕에 얹혀 나를 따라오며 속삭인다. 지고 있는 것도 삶이고 흔들리는 삶이 더 의미가 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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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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