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우울을 피해 나태함의 오후에 나를 맡긴다. 어떤 것도 할 마음이 없어 일단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 먹어본다. 카페인과 단맛에 제법 기분이 나아졌지만 불안함은 여전하다. 이번엔 매운 고추장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참치와 참기름을 넣고 매운 고추장을 넣는다. 아이들이 평소에 즐겨 먹을 때마다 야채 하나 없는 나쁜 비빔밥이라고 무시하곤 했었는데 제법 먹을만하다. 매운 통증이 불안을 마비시켰나 보다. 기분이 생생해졌다.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책과 어질러진 빨래와 이불이 짜증스럽지만 정리할 마음이 안 생긴다. 발에 걸리는 빨래를 한쪽으로 밀고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켠다. 유튜브에서 새로 올라온 영상을 훑어보지만 마땅히 끌리는 것이 없다. 평소에는 열심히 봤던 시사채널도 오늘은 지루하다. 세상 속에 늘 있었던 것들에 새로운 듯 새삼 놀라고 분노하며 불안해하던 나의 모습이 오늘은 바보같이 느껴져 그조차 안 해 본다. 아이를 전쟁터에 밀어 넣을 준비가 된 듯 열심히 살펴보던 입시정보 영상도 헛되게 느껴진다.
음악을 들어본다. 영상을 보자니 눈이 피곤하고 음악은 귀에 거슬린다. 들고 있던 핸드폰이 무겁게 느껴지면서 가슴팍으로 툭 떨어진 핸드폰을 머리맡으로 올려놓고 눈을 감으니 금세 잠이 들었다. 잠시 깜빡 잠을 잔 듯 안 잔 듯. 꿈을 꾼 것인지 조금 전 유튜브에서 본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영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평소 같았으면 열심히 꿈을 생각해내고 그 의미를 살펴봤을 텐데 사라지는 기억을 잡을 힘조차 힘 조차 끌어내기 어려운 오후다. 난 무엇을 피해 이토록 무료함으로 도망쳤을까? 무엇을 위해 이 나태함으로 기어들어 왔을까? 권태로움이 강해질수록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한 분노가 이방인의 총성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내 안의 내가 속삭인다. 삶의 방정식은 단순하다. 잘 살기, 열심히 살기, 최선을 다하기가 x 좌표이다. y 좌표는 다양한 변수들 때문에 예측이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단순하게 y=ax+b라는 일차함수를 적용한다. 노력하면 잘 살 것이다. 그래서 참 열심히 산다. 그런데 누가 이 규칙을 제시했을까? 우리는 애초에 열심히 사는 종족 A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고성능의 AI가 아니었을까? 아침 알람에 일어나서 정해진 일들을 해내고 남은 시간은 또 다른 일들을 찾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구조화된 듯하다.
y=ax+b라는 함수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라는 좌표 안에서 이탈하지 않고 살도록 명령된 삶에 오늘은 어떻게든 저항해본다. 게으름이라는 X 좌표값이 죄책감이라는 Y 좌표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렇게 동굴로 들어간다. 나를 조종하는 너를 실망시키는 방법을 통해 나를 인식시킨다. 예측이 빗나간 것에 놀라고 새로운 통제 방식을 찾으려 분주한 너에게 조소를 던지는 것이 나의 총성이다. 무료함과 권태로움을 통해 나를 파괴하며 나를 증명하려 드는 오후다.
또 다른 내가 속삭인다. 너는 대체 뭐가 그리 초조하여 너의 시작을 부정하며 존재를 인식하려 드느냐? 네가 스스로 알에서 깨어나 스스로 진리이며 존재의 근원이 되고 싶었던가? 영향을 받는 나약한 존재임이 그리도 분노할 일이냐? 마치 ‘아빠보다 내가 더 크다’를 증명하려는 듯 강박적으로 아버지에게 집착하는 오이디푸스와 다를 바 무엇인가? 나르시시즘의 골짜기에서 신이 되고자 한 자신의 좌절된 꿈을 위한 변명이 그리도 궁색하여 자신의 오만에 의미를 부여하려 드니 네가 아직 거기 있는 이유다.
나를 있게 한 그것이 나를 구속하는 거푸집이었고 내 존재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아무리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허물을 벗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그 속에 있다. 어떻게 나를 증명할 것인가? 부모의 놀라운 유산에 숟가락을 하나 더 올릴 것인가? 아니면 부수고 초라한 밥상이라도 차릴 것인가? 이것이 거푸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은 마흔이 넘은 나의 고민이자 사춘기 내 아들의 치열한 자기 정체감의 투쟁이다. 권태와 게으름은 일차함수의 강박적 주문에서 벗어난 한나절의 휴식이자 소외되는 자아에 대한 저항적 자기점검이며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나름대로의 철학적 사유였을까?
<
조은영 워싱턴 문인회>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