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페이지, 아니면 카니 프란시스가 미국의 최고 여자가수인줄로 알았던 이민 초기, TV 뉴스를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웬 뚱보 할머니에게 ‘미국의 목소리’라는 찬사와 함께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영예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했다. 얼굴이 달덩이 같은 케이트 스미스(Kate Smith)를 처음 보고는 곧바로 그녀의 광팬이 됐다.
청아한 목소리에 꾸밈이 없고 발음이 또박또박한 그녀의 히트곡을 100여개 모았다. ‘달이 산위에 떠오를 때’ ‘내가 마지막 본 파리’ 같은 전성기(1930~40년대) 시절 노래가 많고 그 후에 나온 ‘사운드 오브 뮤직’ ‘닥터 지바고’ 같은 뮤지컬과 영화주제곡도 있다. ‘주기도문’과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How Great Thou Art)’ 등 찬송가들도 보석 같다.
그녀의 대표곡인 ‘하나님, 미국을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는 미국의 ‘제2 애국가’로 불린다. 러시아 이민자인 유대계 천재작곡가 어빙 벌린이 헌정한 이 노래를 스미스는 제2차 대전 참전비용 모금 캠페인 라디오방송에서 줄기차게 불러대 정부가 발행한 전쟁채권이 6억달러 넘게 팔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물경 102억달러다.
그뿐 아니다. 필라델피아 프로 아이스하키 팀 ‘플라이어스’는 1969년부터 홈경기 국기배례 의식 때 공식 국가(‘Star-Spangled Banner’) 대신 스미스의 ‘제2 애국가’를 사용해왔다. 명문 프로야구팀 뉴욕 양키스도 전통적으로 모든 야구장에서 관중이 7회 중간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부르는 팝송 ‘나를 야구장에 데려다 주오’ 대신 스미스 노래를 제창해왔다.
특히 플라이어스는 그 노래가 승운을 불러온다며 떠받들었다. 실제로 그 노래를 부른 날엔 대개 이겼다. 1974년 뉴욕 아일랜더스와 붙은 스탠리컵 결승 7차전에선 스미스가 플라이어스 구장에 와서 직접 그 노래를 불렀고, 플라이어스가 4-1로 승리했다. 플라이어스는 그날 노래 부른 스미스 모습의 동상을 그녀가 사망한 다음해인 1987년 구장 밖에 건립했다.
하지만 스미스의 이 같은 영광이 이번 주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다. 플라이어스도, 양키스도 그녀의 제2 애국가를 더 이상 경기장 노래로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플라이어스는 스미스의 동상도 철거하겠다며 검은 천으로 가려놨다. 그녀가 데뷔 직후 1930년대 초에 부른 두 노래에 흑인을 차별하거나 조롱하는 가사가 들어있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이다.
그중 한 노래인 ‘깜씨가 태어난 이유’는 가사가 “누군가 목화를 따고, 누군가 옥수수를 심고, 누군가 노예로 살며 노래할 수 있어야 하네…”로 돼있다. 흑인가수 겸 인권운동가였던 폴 로브슨도 불러서 히트한 노래다. 원래 백인우월주의의 해학 노래로 간주됐었다. 하지만 플라이어스와 양키스는 가사가 현대 미국인의 정서와 양식에 맞지 않는다고 우긴다.
웃긴다. 이들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못 된다. 양키스는 이웃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가 1947년 메이저리그 사상최초로 흑인 재키 로빈슨을 기용한 뒤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흑인선수를 배척한 대표적 인종차별 구단이었다. 플라이어스도 반세기가 넘는 구단 역사를 통틀어 유색인종 선수를 10여명 기용했을 뿐이다. 오늘날의 미 국민정서에 안 맞는다.
스미스는 음악공부를 한 적이 없다. 매우 드문 콘트랄토(가장 낮은 여성음계)지만 두 옥타브 반의 음역을 넘나든다. ‘갓 블레스…’의 끝 부분은 마치 소프라노 같다. 데뷔하자마자 ‘라디오의 퍼스트레이디’로 불리며 방송계를 주름잡았다. 독신으로 살다가 말년에 당뇨가 심해져 한쪽 팔과 유방을 절제 수술했지만 79세에 사망했다. 대통령 훈장 수여 4년 후였다.
거의 한 세기 전 노래가사를 트집 잡아 두 구단이 걸출한 애국 가수를 어처구니없이 매장하자 여기저기서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을 한 시점이나 한 행동만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다”고 가르친다. 스미스는 폐기 대상이 아니라 미국 국민이 아끼고 자랑해야할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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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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