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2월 말 어느 날 새벽 4시40분, 단잠을 자고 있는 중에 휴대폰이 드르륵 울렸다. 스크린에 나타난 건 G메일 아이콘. 한 달 전에 교수 지원서를 냈던 홍콩의 학교에서 온 메일이었다. 보나마나 또 “We regret to inform you that …” 즉 “알려드리게 되어 유감이지만…” 같은 내용이겠거니 생각했다. 이미 떨어졌다는 메일만 수십 개쯤 받았는데 뭐 하나쯤 더 받으면 어떠리. 비몽사몽인 정신으로 엄지를 스르륵 밀어 메일함을 열었다.
뜻밖이었다. 필라델피아-홍콩 왕복 비행기표 및 체제 비용을 모두 지원할 테니 인터뷰에 와 달라는 이메일이었다. 내가 잠이 덜 깼나 싶어 눈을 비비고 봐도 같은 내용이었다.
3월 한 달 내내 프리젠테이션과 인터뷰 준비에만 매달렸다. 발표 개요를 짠 다음 학과 교수님들과 점검하고, 잘 쓸 줄 모르는 포토샵을 붙들고 끙끙거리며 발표 자료를 만들고, 친구에게 부탁해서 홍콩 학교를 나타내는 이미지도 만들고, 교수님들과 친구들을 모두 모아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녹화한 프리젠테이션을 여러 번 돌려보면서 메모하고, 발표연습실을 대여해서 자세, 눈빛, 어투, 몸짓 하나하나까지 신경써가며 발표를 더 가다듬었다.
우연히 다른 경쟁자들이 누군지 알게 되었을 땐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도 오고 이미 교수인 사람들도 오는데, 겨우 대학원생인 내가 과연 뽑힐 수 있을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채용 결정은 학교가 하는 거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쉬움이 남지 않을 정도로 노력을 쏟았으니 인터뷰가 끝났을 때 뿌듯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아닐지 정도다.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나를 속일 수 없다. 그러니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들뜬 마음으로 홍콩행 비행기를 탔고,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지적 자극을 많이 받았고, 준비해 간대로 아쉬움 없이 발표를 끝냈으며, 인터뷰에서도 좋은 질문을 많이 받았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내가 목표했던 대로 뿌듯하고 개운하게 미국행 비행기에 다시 오를 수 있었다. 15시간의 기나긴 비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바쁘게 일상을 보내다 보니 학교에서 다시 메일이 와있었다. 다른 사람을 뽑기로 결정했다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좋은 기회를 잡아서 기뻤고 난생 처음으로 홍콩 구경도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고,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더 보완해가야 하는지 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이 피말리는 과정을 다시 또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는 언제쯤 학생에서 벗어나서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하는 어엿한 성인으로, 또 학생을 이끌어주는 모범적인 선생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질문이 마음 속에 뱅뱅 맴돌았다.
동시에 책상에 써 붙여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 떠올랐다. “그 질문을 잠긴 방이나 매우 낯선 언어로 쓰인 책처럼 여기고 그 자체로 사랑하세요.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지금은 그 답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살아가세요. 그러다보면 미래의 어느 날에,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그 답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언젠가는 내가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내가 원했던 모습이 되어있을 거라 생각한다. 10년 전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만한 삶을 지금의 내가 살고 있듯이. 내 질문의 답은 지금 주어지지 않겠지만, 질문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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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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