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라 이토록 노래할 수 있을까…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내 진정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청마 유치환이 통영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청마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한 여선생을 사무치도록 사랑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고작 21살, 청상의 몸으로 살아가던 여류시인 이영도였다. 그렇지만 엄연히 가정을 갖고 있던 청마는 이미 결혼이란 제도에 묶여 있는 몸이었고 이영도 역시 청상의 몸으로 처자를 거느린 남자의 순정을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당시의 사회가 녹녹치 않았다.
그러니 더욱 더 간절해서 그랬을까 1947년 부터 1967년까지 청마가 교통사고로 작고할 때까지 무려 20여년의 아프고도 애틋한 사랑이 5000여통의 편지로 남아 훗날 책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게 오늘날까지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진, 바로 불후의 연가(戀歌)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이다. 그 애끊는 마음을 표하는 대목으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처럼 까딱치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도대체 날 어쩌란 말이냐 라고 절규하는 싯구절로 보아 당시의 애절하고도 애틋한 시인의 마음과 겨울 성에가 차오르는 듯, 한 영혼에 대한 쏠림과 향함이 얼마나 저리고 간절한 것인가를 짐작하기에는 차고도 넘친다.
이번엔 시공간을 뛰어넘어 미국 플로리다의 어느 스타벅스 Drive Thru의 한 장면이다. 길게 줄지어 있는 차속에서 무슨 이유에선가 공연히 기분이 좋아진 한 손님이 자신의 커피값을 지불하면서 치기였는지 허세였는지 하여튼 장난처럼 뒷사람의 커피값을 대신 내주고는 총총히 떠났다. 이에 스타벅스 종업업이 그 다음 손님에게 커피를 건네주며 그 자초지종을 설명한 즉, 앞선 손님이 당신의 커피값을 내주고 갔으니 당신은 그냥가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제서야 이해를 한 뒷 차 고객은 탄성처럼 작은 감탄을 하며 그럼 나도 뒷 사람의 커피값을 대신 내겠다고 했다 (I’ll pay it forward then). 이에 그 내용을 알게된 그 뒷사람도 또 그 다음 고객도 환한 미소와 더불어 기꺼이 얼굴도 모르는 다음 고객의 커피값을 지불했고 마침내는 일련의 작은 기적이 줄지어 일어나 그 기적은 무려 28일이나 지속되었다.
객기 같지만 한 고객의 엉뚱한 짓으로 스물 여드레 동안 수 많은 고객이 웃음지었으며 그들의 하루가 필경 빛나고 상글거렸을 것이다. 스타벅스 역시 전혀 손해를 본 것도 아니요 그 작은 기적을 낳은 최초의 고객도 지불한 금액이 고작 다음 고객의 커피값 한 번이었으니 실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수많은 무리를 먹이셨다는 누가복음의 오병이어를 내가 연상했다면 너무 지나친 감상이 될런지 모르겠다.
무리짓는 우리들의 삶은 어차피 품앗이를 전제하고 있다. 삶의 구석구석 녹아있는 사랑도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고 또 와야 가게끔 되어있는 일종의 물고 갚는 품앗이로 보아도 무방하다. 심지어 구도와 베품의 종교마저도 예배와 법회를 드리고 빌고 바치는 기도에도 헌금과 보시라는 우리가 치뤄야할 몫이 있다.
다시말해 신과의 만남에도 어느 일방이 헌신을 삼아 죽도록 정성을 기울이는 일은 이 세상엔 없다는 셈법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경우 사람의 일엔 그 곡절이 있는 법, 밭 팔아 논 살 때는 쌀밥 먹자고 하는 짓이나 그렇다고 해서 늘 그런 것은 아니다. 투입과 산출의 현저한 불균형인채, 당사자에게 되돌리는 되갚음(pay back)이 아니라 수혜자와는 상관 없이 진행된 우회적 되돌림(pay forward)의 미학도 확실히 세상엔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러 손해 보기도 하며 또 손해 볼 줄 뻔히 알면서도 일을 도모하는 게 사람이어서, 더욱이 사람의 감정은 정교하게 오작동을 하는지라 더더욱 그렇다.
전형적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그러기 쉽상이다. 가시고기 사랑이 그러하듯 댓가를 바라지 않는 무구한 헌신이 그러하며 다시 만날 인연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마음에 끌리어 제 주머니까지 털어주는 것 역시 쉬 설명하기 어렵다. 평생의 축적을 유산으로 남기는 것과 사회에 기부하는 일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왕왕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시인을 닮아 아무런 댓가 없이 드리워진 애정어린 헌신을 우리 모두 고까와 할 이유도 아까와 할 까닭도 없다. 기다림은 꼭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베품과 시혜(施惠)는 반드시 갚음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족하리라. 그냥 사랑했으므로 행복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나 훈훈한 선의의 고양(高揚)으로서 넉넉할 뿐 그렇게 사는 것도 살구색 웃음꼬리를 물고사는 우리네의 삶이니 그렇다.
4월의 벚꽃 그늘아래서 우리 한번 시인이 되어 그토록 읖조려 볼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나니 그리운 이여! 설령 이것이 이 세상의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 내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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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혜 부동산인,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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