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지난 11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톱다운 핵 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제4차 남북정상회담과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무기 구매에 사의를 표명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과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로 미국의 일자리와 수출이 늘어났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굳이 성과를 찾는다면 이런 정도이지만 더욱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원했던 핵심 의제들에 미국이 공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북한의 평화공세와 이후 전개된 대화 국면에서부터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미관계의 경직, 대북제재로 인한 남북 협력사업 지연 등에 이르는 저간의 사정들을 종합할 때 이번 회담에서 한국 정부의 주목적은 핵 대화의 모멘텀을 살리기 위한 한국의 중재자 역할, 대북제재 완화 및 남북 협력사업의 본격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위한 여건 조성 등으로 압축될 수 있다. 하지만 두 정상이 나눈 대화와 회담 후 양국이 내놓은 언론발표문을 보면 한미 간의 간극은 여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완전한 북한 비핵화(FFVD)’를 불변의 목표로 고수했는데 이는 한국이 사용하는 ‘한반도의 비핵화’ 또는 북한이 사용하는 사술적인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표현과는 다른 의미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일괄타결 빅딜’ 및 ‘모든 대량살상무기 폐기’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의미 있는 스몰딜(굿이너프딜·충분히 좋은 합의)’을 수용하라는 한국 정부의 권고와 궤를 달리했으며 “지금은 적기가 아니다”라는 말로 대북제재 완화와 개성·금강산 재개를 원하는 한국의 요구를 일축했다.
제4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회담을 하게 되면 결과를 알려달라”는 말로 ‘불반대’를 시사하면서도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위한 여건이 되는 제재 완화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실질적 비핵화가 없는 상태에서는 제재를 완화할 수 없고 떠들썩한 남북정상회담도 탐탁하지 않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이 자청한 중재자 역할도 북미 양쪽 모두로부터 평가받지 못하는 형국이다. 하노이회담 결렬 후 미국은 북한의 환적 밀수에 가담한 한국 선박들을 공개하면서 한국에 ‘대북제재 공조’를 압박했고 정상회담을 전후해 미 의회는 “한국이 동맹국이라면 중재를 할 것이 아니라 동맹공조를 해야 한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김 위원장도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조선 당국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촉진자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제정신을 가지고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그동안 북한에 퍼부어온 정성과 ‘자해(自害)’라는 비난까지 들으면서 국방과 군사 분야에서 취한 양보조치들을 감안하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비외교적’ 발언이었다.
이렇듯 핵심 의제들에 대한 공감이 불발되면서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되기에는 역부족인 ‘번개팅’으로 마감됐고 그래서 회담 후 양국이 따로 발표한 언론발표문은 ‘각자 긁고 싶은 다리를 긁은’ 꽤나 상이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한국 정부의 노력에도 북핵·남북관계 문제들은 하노이회담 결렬 후의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게 됐다. 북핵 문제는 북미 양국이 대화의 문만 열어뒀을 뿐 여전히 미궁 속이며 평양 정권은 ‘완전한 북한 비핵화’를 거부하면서 “미국이 일방적 자세를 버리고 개선된 계산법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등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평화’를 공약하면서 개성과 금강산부터 다시 열어보겠다는 한국 정부의 야심 찬(?) 구상도 아직은 제자리걸음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추진할 것인지를 궁금해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3년 차가 시작되고 집권세력에 대한 여론이 달라지는 가운데 내년 총선까지 앞둔 시기여서 누군가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려 하지 않겠느냐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당치 않다. 지금은 제재가 완화되지 않고 북한의 핵 포기 거부도 지속되고 있다. 즉 상호 간에 주고받을 것이 없는데다 북한의 무례한 발언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데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같은 떠들썩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다면 명분 부족으로 국론 분열이 초래될 뿐 아니라 국제적인 모양새도 이상해지고 동맹공조의 복원도 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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