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서울의 이웃에 잘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다. 하얀 피부에 귀태가 흐르는 얼굴, 누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때 여섯 살쯤 되었던 부열은 자폐아였다. 자기만의 세계에 사는 아이는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고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집엔 개인교사가 방문해 아이를 지도했는데, 젊은 여자 선생님이 그림 카드를 하나씩 들어 보이며 아이에게 사물의 이름을 반복해 말하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그 엄마와 나는 같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새벽 미사도 함께 가던 좋은 이웃이었지만, 나는 미국으로 그녀는 아랍으로 중국으로 서로 헤어져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따금 생각이 날 때면, 적극적 성격으로 현실에 늘 현명하게 대처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디선가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꼭 1년 전쯤 나는 무심히 그녀와 부열의 이름을 포털사이트 검색 창에 타이핑했다. 누군가의 소식이 궁금해지면 그렇게 검색하는 버릇에 그들의 이름을 쳐 넣자 사진과 뉴스가 여럿 떠올랐다. 전엔 길게 늘였던 머리를 단발로 자른 아직도 미모의 그 엄마와 이제 청년으로 성장한 부열의 모습에 반가움과 감격이 밀려왔다.
부열은 화가가 돼 있었다. 핸섬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의 모습에 어릴 때 볼살이 통통하던 얼굴이 오버랩 됐다. 또래의 아들을 가진 나는 그 나이 청춘들의 고뇌와 욕망을 잘 감지하는데, 부열의 표정은 그저 하얀 눈이 살포시 쌓인 벌판만 같았다. 세상을 향해 욕망하거나 미래를 고뇌하지 않는 특별한 청춘의 그 표정은 맑기만 했다.
벌써 개인전과 단체전 등 수많은 전시회를 열어 만만찮은 이력을 쌓은 부열의 그림들을 인터넷으로 하나씩 찾아보며 나는 앤디 워홀과 피카소를 연상했다. 인물을 겹쳐 표현하는 그의 그림엔 독특함이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는 부열은 너무도 많은 드로잉을 해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닳을 정도라고 했다. 그의 작품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신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섬세함이 있었다.
보통 청년이라면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을 꿈꾸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홀로 그림을 그리며 그 안에 자신의 생애를 다 부려 넣고 있었다. 그것은 고독하나 특별하고도 숭고한 작업이었다.
그 특별한 한부열 화가의 작품이 다른 자폐장애 화가 17인 작품과 함께 엘에이 한인 타운에 전시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4월29일에서 5월3일까지 타운의 한 갤러리에 전시할 18인의 작품들을 사진으로 미리 받아본 나는 그 높은 완성도에 깜짝 놀랐다.
전시될 작품들 중엔 한부열 화가의 아버지가 자폐아를 표현한 그림도 한 점 있었다. 뇌의 구조를 본뜬 ‘미로 속 퍼즐 한 조각’이라는 모티브로 구성한 그린 톤의 작품은 자폐장애 화가들 작품에선 느낄 수 없던 어떤 아픔이 느껴졌다. ‘항상 독특하고, 전적으로 흥미롭고, 가끔은 신비롭다’는 문구가 미로 그림 안에 영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미로의 끝은 물음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들을 30년 넘게 키워온 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그림이었다. 미로를 더듬는 심정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펴야 했던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에선 아픔의 바람이 불어나오는 듯했다.
제 세계에 갇힌 채 사는 아들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흰 눈 벌판처럼 신비하고 아름다웠지만, 부모의 마음은 그 긴 세월 세상에 긁힌 상처가 얼마나 가득하랴. 어찌 보면 세상에 상처받지 않고 자기 안에서만 살아가는 자폐장애 화가들이 더 축복받은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들은 왜 장애자로 불리고 우리는 왜 보통 사람으로 불리는지를. 혹 신은 그들 영혼 세계의 문을 은총의 열쇠로 잠그고 그 안에 빛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소용돌이가 하늘로 솟구쳐 어둠 많은 세상을 비추도록.
청년 화가 한부열의 성장 뒤엔 그 부모의 희생적 보살핌이 있다는 걸 다시 생각하며 눈시울이 젖는다. 나의 옛 이웃 그녀의 가슴에도 아들을 닮아 번져있을 무지갯빛 소용돌이를 짐작해 본다. 장하다! 한부열 화가와 그 엄마! 거의 30년 만에 만나게 될 그들 앞에서 울지 않도록 나는 지금부터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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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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