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사고, 말, 행동의 결정 요소는 지(知), 정(情), 의(意)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이 모든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요사이 급속도로 인공지능(AI)을 가진 로벗의 역할이 커지는데, 아무리 스마트한 로벗이라도 정(감정, 느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인생에서 감정을 뺀다면 그 삶은 삭막하고 황량한 사막과 다름이 없고, 모든 예술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감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필수 요소이다.
감정은 실로 다양하여, 세밀하고 미묘하고 복합적인 것을 제외하고도 기쁨, 슬픔, 미움과 노여움, 수치심, 죄책감과 후회감, 억울함, 두려움, 외로움과 우울감 등 여러 종류이다. 이 중에서 특히 죄책감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간은 대체로 실수, 혹은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면 후회감, 죄책감을 느낀다.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반복되는 잘못에도 후회감,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중병을 앓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우리가 느끼는 이 감정들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타당한지, 또는 신뢰할만한 것인지 살펴보는것 또한 중요하다. 특히 요사이 만연된 풍조 “느낌대로 살라. 좋게 느끼면 그 느낌대로 따라 살라”때문에 우리 느낌의 신뢰성을 더욱 더 질문하게 된다.
오래전에 가정사역에 힘쓰는 제임스 답슨 목사의 “당신은 감정을 믿을 수 있나”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의 실제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소개한다. 한 젊은 엄마가 어린 딸의 손을 붙잡고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의 파란불을 기다리던 중, 딸이 길을 건너도 좋으냐고 물어보았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엄마가 딸의 손을 생각없이 놓았고, 그 딸은 길을 건너다 자동차에 치어 숨을 거둔 비극적 사건의 이야기다. 이 엄마는 자기가 딸을 죽였다는 심한 죄책감에 견딜 수 없어 답슨 목사를 찾아와 상담한 내용이다. 슬프고, 안타깝고, 비극적 사건이지만, 과연 “내가 딸을 죽였다”는 이 엄마의 죄책감은 정당하고 신뢰할만한 감정일까?
얼마전 고등학교 동창 K의 고등학생 아들이 오래전에 학교에서 심한 왕따와 폭력을 건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알게 되었다. K는 회사일로 너무 바빠, 10대 아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쏟지 못해 일어난 비극이라고, 다시 말하면 아들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는 죄책감으로 오랫동안 심하게 심적 고통을 겪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K는 다행히 이 아픔과 죄책감을 극복하고, 그 고난을 사회봉사에 전념하는 것으로 승화하여 ‘청소년 폭력 예방재단’(청예단)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그 귀한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에 들은 안타까운 이야기를 나눈다. 장애우들을 집회 후 집에까지 데려다 주는 자원봉사 운전자가 한 정신지체장애 소녀를 그 소녀의 집 길 건너편에 내려 놓았고, 길을 건너던 그 소녀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가슴 아픈 사연이다. 아마도 평소에도 오랫동안 그렇게 해 왔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그 날도 이 봉사자는 평소대로 했으리라 생각된다. 장애우를 사랑하여 5년 이상 섬겨오던 이 자원봉사자가 느낄 심한 후회와 자책감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적 사고이기에 그분이 빨리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정상적 마음 가짐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랄뿐이다. 죽음을 당한 이 소녀의 부모님은 마침 신앙이 견고한 분으로서, 원망이나 법적 대응없이 사랑으로 이 슬픔을 잘 감당하고 계시다니 감사한 일이다. 믿음의 힘의 실체를 보는듯 하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 모든 인간은 흠이 많고 불완전한 존재다. 혹시 우리가 너무 완전해지려는 망상때문에, 우리의 약점이 타인에게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고, 감추려고 전정긍긍 한다면 그 삶은 아주 피곤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그 근거와 동기를 성찰하여 혹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헛된 기대감, 혹은 지나친 자기 중심적, 이기적 태도가 그 감정의 원인이라면 그것을 매일 버리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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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효 약물학 박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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