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주말산행 동료들 중에 미국인이 4명 있다. 모두 한국미녀를 아내로 둔 백인들이다. 원래 동호회 이름이 시애틀 한인산악회였지만 동포회원의 이민족 배우자도 포용하자는 취지에서 ‘한인’을 뺐다. 매주 토요일 아침 들머리에 둥그렇게 둘러서서 인원점검을 할 때 이들 미국인 회원은 한국말로 씩씩하게 자기 번호를 외친다. 10단위도, 20단위도 문제없다.
요즘엔 등산로에서 미국인들로부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들어도 덤덤하다. 최근 눈 덮인 등산로에서 뒤에 오던 미국인 청년 서너 명이 나를 앞질러 갔다. 한명은 T셔츠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어이없어서 “대단하군…”하고 혼잣말을 했더니 청년이 뒤돌아보고 웃으며 “괜찮아요. 안 추워요”라고 말했다. 원어민 영어교사로 한국에서 2년간 살고 왔단다.
‘어머, 한국말 하시네요’라는 제명의 수필집을 최근 재미있게 읽었다. 동료 문인인 정동순씨의 첫 작품집이다. 역시 미국인 남편을 둔 정씨는 이민 온 후 무려 13차례 도전 끝에 자신의 ‘드림 잡’인 공립도서관 사서가 됐다. 그 후 도서관에 찾아오는 한인들에게 “도와드릴까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어머, 한국말 하시네요!”라며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단다.
근래 방탄소년단(BTS) 등 K-팝에 매료된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어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우리가 반세기 전 최동욱의 ‘세시의 다이얼’(동아방송) 프로에 매달려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미국 팝송을 따라 부르며 영어를 배웠듯이 SNS에 뜨는 K-팝 뮤직비디오를 미국 청소년들이 따라 부르며 한국어를 배운다.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
K-팝 뮤비에 영어자막을 달아놓은 유튜브 동영상이 수두룩하다. 트위터에는 ‘감자밭 할매’ 등 BTS 히트송을 중심으로 한 K-팝 가사 번역계정이 인기다. 인스타그램에도 해시태그(#)가 붙은 ‘한국어 공부’ 게시물이 13만3,000여개에 이른다.
한국어 연수를 위해 2017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3만여명이었다. 일반 유학생(2만8,000여명)을 처음으로 능가했다.
현재 100여개 미국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개설돼있다. 미국 현대 언어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2009~2016년 미국 대학의 외국어학과 수강자 수는 중국어가 11%, 독일어가 16%, 일본어가 5%씩 줄어들었지만 한국어는 63%나 늘어났다.
지난 2016년 한국어를 수강한 전국의 미국인 대학생 수는 1만4,000여명이었다. 20년 전 163명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다.
한인 후세들의 모국어교육 기반도 탄탄하다. 한국 재외동포재단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북미지역(미국, 캐나다) 16개 재외공관을 통해 지난해 총 1,051개 한글학교가 본국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학생 수는 5만6,260명, 교사 수는 9,637명이다. 대부분 주말에만 가르치며 비영리기관 형태의 대규모 학교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한인교회에 부설된 사설학교이다.
한국어 사용자(7,720만명)는 지구촌의 6,900여개 현존 언어 중 12번째로 많다. 중국어(12억8,400만명), 스페인어(4억3,700만명), 영어(3억7,200만명), 아랍어(2억9,500만명), 힌디어(2억6,000만명), 벵골어(2억4,200만명), 포르투갈어(2억1,900만명), 러시아어(1억5,400만명), 일본어(1억2,800만명), 란다어(1억1,900만명), 자바어(8,440만명)의 뒤를 잇는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한국어가 여전히 소수언어다. 한국어를 교과과목으로 가르치는 미국 초중고교는 불과 70여개다. 중국어(1,000여개), 일본어(700여개)에 족탈불급이다.
미국대학의 한국어 수강학생이 늘어난다지만 전체 순위는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중국어, 아랍어, 일본어, 러시아어에 뒤진다. 그나마 10위권 안에 드는 게 다행이다.
수필집을 낸 정씨는 다시 끈질긴 도전 끝에 미국 공립고교의 한국어 교사가 돼 이민 전 본직을 회복했다. 정씨 같은 의지의 ‘한국어 포교사’들이 많아지기를 바라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한국 인구가 올해부터 줄어들기 시작한다. 신생아 수보다 사망자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겨우 따돌린 한국어의 위세가 얼마 못가 수그러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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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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