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 편집숍 운영하는 70세 동갑 일본인 하야시 부부
▶ 매장 여럿 꽤 큰 패션회사 운영, 50세 때 미련없이 회사 떠나, 아담한 옷가게 열고 인생 2막
“앞으로 10년, 20년, 나를 잃지 않고 일하고 싶다”는 하야시 부부. 왼쪽이 다카코씨, 오른쪽이 유키오씨다. 부부는 은퇴를 서두르지 않는다. 원하는 속도대로 일하는 요즘을‘인생 2막’이라 부른다. <마음산책 제공>
디테일이 살아 있는 기본 아이템에 소품을 곁들일 것. 하야시 부부의 패션 원칙이다. 다카코씨는 모자를 자주 쓴다.
데님을 두려워하지 말자. 단, 되도록 단정한 데님으로. 가볍고 잘 늘어나는 데님을 고른다. / 흰색 옷은 마법의 아이템이다. 노르스름해진 흰색이라면 차라리 안 입는 게 낫다. / 유키오씨에게다카코씨는, 다카코씨에게유키오씨는어떤존재인가를물었다.“ 가장가까운존재이면서 가장 먼 존재입니다.” <마음산책 제공>
삶은 끝나기도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운명이 모든 걸 결정하진 않는다. 때로는 선택이 삶의 행로를 가른다. 1949년생 동갑인 일본인 부부 하야시 유키오씨와 하야시 다카코씨는 ‘계속되는 삶’을 택했다. ‘요란하고 조급한 인생 2막’은 부부의 취향이 아니었다. 살아온 대로 살기로 했다. 단, 원하는 만큼 느긋하게. “앞으로 10년, 20년 나를 잃지 않고 일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내 속도대로 하면 좋지 않을까.”
‘멋의 도시’ 고베 태생인 하야시 부부는 40여년째 옷을 판다. 일본 전역에 매장이 있는 꽤 큰 패션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어느 날 회사가 너무 커졌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를 나와 ‘느긋한 어른들의 가게’를 꾸렸다. 혼슈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아담한 옷 가게, 우아하게 부르자면 패션 편집숍인 ‘퍼머넌트 에이지’다. 최근 출간된 산문집 ‘근사하게 나이 들기’(마음산책)는 부부의 인생 2막 이야기다. 어른의 멋을 누리는 이야기, 나이의 맛을 알아 가는 이야기. 부부를 이메일로 만났다.
하야시 부부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다. 자연스럽게, 부부가 됐다. 남편인 유키오씨는 원조 패셔니스타였다. 바지 길이 1, 2㎜에 집착하고, 교복 바지 주름이 펴질까 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당연히’ 패션 회사에 들어갔다. 이내 사표를 내고 옷을 만들었다. 전업 주부였던 다카코씨가 판매를 맡았다. 부티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판매 노하우를 속성으로 배우기도 했지만, 영업에 재능이 있었다. 부부는 정말로 열심히 했다. “옷 만드는 일에 있어선 어떠한 타협도 없이, 납득될 때까지 파고들었다.”
하야시 부부가 패션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 일본은 호황이었다. 일본 열도가 패션에 눈뜬 시절이기도 했다. 부부의 사업은 “시대의 순풍에 돛 달고” 나날이 커졌다. 회사가 부부의 삶을 집어삼켰다. 부부 손으로 차린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2000년, 부부가 50세 때였다. 패션을 떠날 순 없었다. 같은 해 ‘퍼머넌트 에이지’를 열었다. 60세가 되면 가게를 접기로 했다. 은퇴할 날을 기다렸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던가. 하야시 부부는 은퇴를 유예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하는 노년’을 살기로 했다. 60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부부는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있다. 하야시 부부는 속도를 한껏 늦춘 요즘의 삶을 인생 2막이라 부른다. 은퇴하지 않으면, 하던 일을 버리지 않으면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없다는 편견에 도전 중이다. “지금까지 지내 온 인생과 180도 다른 것을 하고자 하는 마음, 물론 훌륭하다. 그러나 층층이 쌓아 온 삶의 방법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도전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토대를 살리는 원만한 도전이 좋다고 생각한다.”
빛나는 인생 1막 무대에서 내려오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다. 돈이 궁해서도 아니다. 부부에겐 등골 휘어지게 뒷바라지할 ‘어른 아이’가 없다. 그저 일이 즐거워서다. “‘퍼머넌트 에이지’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기쁘다. 세상을 향한 문이 여전히 활짝 열려 있는 느낌이다. 일을 함으로써 나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다카코씨) “스스로 결승점을 정하지 않더라도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온다. 그때가 온다면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러나면 된다. 지금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유키오씨)
하야시 부부는 건강하다. 그래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안다. ‘퍼머넌트 에이지’에 정성을 쏟되, 헌신하지 않는다. 일과 놀이 사이에서 부지런히 균형을 잡는다. 한국에 비하면 일본은 노인 복지 선진국이다. 노인정, 공원, 공짜 지하철 말고도 노인들이 즐길 여가 시설이 많다. 유키오씨는 문화 동아리에 가입해 당구를 치고 블루스 하프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린다. 언젠가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다카코씨는 영어 회화를 배운다. 회화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지만, 언어를 통해 외국의 문화를 배우는 게 흥미롭단다. 둘이 함께 여행도 자주 다닌다.
‘휴일에 되도록 외출하기’와 ‘거절하지 않기’는 ‘사회적 노인’으로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하야시 부부가 세운 원칙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는 언제나 신선한 감동과 발견이 있다. 누구에게든 어떤 것이든 제안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는다는 걸 마음에 새기고 산다. 제안이 온다는 건 아직은 우리에게 사회성이 있다는 증거니까(웃음).” ‘퍼머넌트 에이지’의 직원들은 젊다. 하야시 부부는 자식뻘인 직원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그들에게 매일 배운다. “노인들이 청년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가려는 노력을 하면 좋겠다. 청년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는 걸 노인들이 깨달았으면 한다. 노인들과 청년들이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 서로를 칭찬하는 것이다. 칭찬받고 기분 나빠할 사람이 세상에 있나.”
노년의 패션을 정의하는 보통의 말은 ‘화려함’이다. 육체가 허물어지는 걸 야단스러운 옷으로 감추려 한다. 하야시 부부는 패션 공식을 다시 썼다. “누구나 나이 들면서 변해 간다. 젊었을 때 어울리던 옷이 어울리지 않는 건 당연하다. 멋이란 무리하거나 뽐내는 것이 아니다. 잠시 자신에게 흥미를 갖는 것이다.” ‘품위 있는 일상복’이 부부가 찾아낸 어른의 진짜 패션이다. “옷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곧 질린다. 일상복이야말로 보통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근사하게 만든다. 인생에는 보통의 날이 압도적으로 많은 법이다. 일상을 즐겁게 해주는 평소의 옷이야말로 풍요로운 매일을 만들어 준다.”
패션은 하야시 부부의 삶이다. 부부는 옷을 대충 입는 법이 없다. 소재와 디테일, 브랜드를 깐깐하게 따진다. 유키오씨는 기본 디자인의 남색 재킷을 10벌쯤 갖고 있고, 다카코씨는 마음에 쏙 드는 흰색 테 안경을 몇 년째 찾는 중이다. “옷은 우리의 ‘세컨드 스킨(제2의 피부)’이다. 몸과 마음을 보호하고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매개이자,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존재다.”
노인 빈곤 문제로 세계가 난리인데 패션이라니, 배부른 이야기 아닐까. 나이 들면 내면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닐까. 부부는 동의하지 않았다.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처지여도 알몸으로 살 순 없지 않나.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생기를 잃는다. 패션의 도움을 받는 게 해법이 될 수 있다. 일상에 조금씩의 패션을 들여놓는 건 나이가 많든 적든 꼭 필요한 일이다. 나이 들었다고 옷에 무관심해지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하야시 부부는 가난하지 않다. 연금에 기대 팍팍하게 사는 노인들과 다르다. 그래서 행복한 건 아닐까. 돈이 없어도 과연 근사하게 나이 들 수 있을까. “노년의 행복에 돈이 필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돈보다 필요한 건 건강이다. 첫째도 둘째도 건강이다. 건강에서 피어나는 웃음이야말로 중요하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일상 안에 노년의 행복이 깃들어 있다.”
‘나이 드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기.’ 하야시 부부가 일러준 근사하게 나이 드는 비결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노인, 특히 여성 노인이 끔찍해하는 검버섯과 주름과 백발을 다카코씨는 “멋을 위한 무기 3종 세트”라고 부른다. “회색 머리에 염색으로 베이지색을 약간 추가했더니, 빨강, 초록, 보라 같은 선명한 옷과 잘 어울린다. 검은 머리일 때보다 옷의 색을 조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밝은 나를 표현하고 근사한 인상을 주는 건 옷 연출법과 행동이다. 검버섯, 주름, 백발, 다 괜찮다. ‘약간 귀여운 할머니’가 되기 위한 요소라면!”
하야시 부부는 언젠가는 정말로 은퇴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은퇴하고 훌훌 떠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부부의 스타일이 아니다. 부부는 늘 다음 세대를 걱정한다. “우리 나이가 되었을 때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다음 세대로 바통 터치 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일이 다음 세대에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생각해 준다면 감개무량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기대 이상이네요. 당신들이 가능했다면, 우리도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하야시 부부의 노년 패션 팁 ‘근사하게 나이 들기’에 나오는 하야시 부부의 패션 조언. ‘갑자기 패셔니스타가 되는 법’보다는 ‘촌스러워지지 않는 법’에 가깝다.
① 시대 감각은 작은 디테일로 표현된다. 지금을 어필하면서 나만의 스타일을 갖기 위해서는 사소한 디테일에 까다로워지자. 사소함이 즐겁다.
② 케케묵은 것을 남겨두면 멋에서 멀어질 뿐이다. 갖고 있으면 입게 된다. 멋이라는 벽에 부딪혔다면 입지 않는 옷부터 버려라.
③ 서양식 옷과 친하게 지내려면 자신의 신체적 약점부터 알아야 한다. 약점을 보완하는 비법을 축적하는 것이야말로 균형 있는 옷차림을 가능하게 한다.
④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갖춰야 하는 색은 흰색이다. 팔방미인 색이어서 다른 색과 짝이 되면 분위기가 확 변한다. 단, 무명색이나 크림색이 아닌 순백색이어야 한다. 흰색 티셔츠만은 매년 새것으로 바꿔 입자.
⑤ 데님 바지는 캐주얼한 연출에 빼놓을 수 없다. 심하게 탈색하거나 찢은 데님은 금물. 어른이라면 원 워시(풀 먹인 데님을 한 번만 헹구는 것) 데님 정도까지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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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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