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일제치하 내 어머니는 당시 제주 어머니들이 그러했듯 모진 역사를 강한 숨비 소리 속에 토하듯 삶을 시작한다. 고향은 제주 북동쪽에 위치한 조천면 북촌리. 성주 이씨의 집성촌이다. 어머니 역시 성주 이씨 집안의 1남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천면은 대대로 일제시대부터 항일 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동네로 제주도에서 꽤 유명하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큰할아버지의 소개로 서쪽 동네의 건장한 총각을 만나 신창리라는 제주도 서쪽 끄트머리 동네로 시집을 가면서 제주 4.3의 가장 비극적인 마을인 북촌을 떠나게 된다. 그때가 해방년이라 하니 1945년이리라.
해방 후 아버지는 한림면사무소의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셨고, 그 덕에 내 부모는 해방 후 몰아친 이념의 험하고 날카로운 대결 정국의 물결을 큰 고초 없이 지내고 계셨다. 아마도 새로운 곳에서 어머니는 행복한 신혼의 달콤함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그리고 이듬해 태어난 첫째의 출산과 더불어 시작된 어미로서의 책임과 기쁨을 누리는 소박한 아낙네였으리라.
해방 후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 기대했던 제주도민들은 미군정의 학정과 경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런 저런 민생의 문제들이 쌓여 1947년 3.1절 기념행사 사건을 기점으로 분출된다. 3만명이 제주시에 모여 행사를 하던 중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6명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이 사건으로 3월 10일 도지사를 포함 제주도 직장인의 95%인 4만1,000명이 경찰의 과잉 진압 사과를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가게 된다.
미군정과 경찰은 3.1절 시위와 파업에 대해 좌익 선동에 의한 빨갱이 파업이라 단정 짓고, 파업 주동자 색출 및 고문, 육지에서의 경찰 병력강화와 통행금지령, 더욱이 어머니까지도 치를 떨게 만들었던 서북청년단의 끔찍한 횡포가 자행된다. 여기에 48년 3월 경찰에 끌려가 고문 받던 3명의 청년의 죽음은 4.3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다.
문제는 4.3 무장봉기의 주체가 제주도 남로도당이라는데 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민중항쟁이 좌익 빨갱이의 반란으로 너무 쉽게 규정되고, 도민들은 이념의 양편에 서야만 했다. 미군정과 제주 경찰 폭정에 대한 항거가 이념 대결로 바뀌면서 3만명이상 희생이 시작됐다. 그래서 제주 4.3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명작업이 필요하다.
당시 어머니 고향 북촌리는 인구 560명의 아담한 마을로, 주민자치에 의해 평온한 일상을 꾸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동네처럼 북촌리 역시 경찰과 마찰을 빚어오다 1949년 1월 17일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산으로 올라간 무장대의 습격으로 북촌리를 지나던 군인 두 명이 사살된다. 이 사건이 북촌리와 상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북촌리 어르신 10여명이 군인 시신을 들고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까지 간다. 하지만 대대본부에서는 이들 10여명을 즉결처형 해버렸다. 그 자리에 나의 외할아버지가 계셨다. 그렇게도 허망하게 군인에 의해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 바로 밑 4녀1남 중 남동생 즉 나의 외삼촌이 계셨다. 4.3이 터지고 동네의 다른 청년들처럼 자의반 타의반으로 북촌리를 떠나게 된다. 당시 한림면사무소에 근무 중이던 아버지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아 누님 집으로 피신을 왔다. 어머니는 삼촌에게 본인의 이름을 쓰지 말고 가명을 쓰라고 하곤 토벌대를 따라 다니라했다. 삼촌은 죽창을 메고 토벌대를 따라 산으로 무장대를 잡으러 다녔다고 한다. 남동생을 살리기 위한 누나의 조치로 인해 삼촌은 죽창을 매일 들고 나서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삼촌에게선 그 어떤 4.3에 대한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1949년 1월 17일, 눈발이 날리던 아침부터 군인들은 북촌리 전체를 방화하고, 주민을 전부 국민학교에 소집시켰다. 군경가족과 일반인을 줄을 갈라서게 하고, 기관총을 이용해 전부 몰살시킬 것인가, 아님 사살훈련이 안된 군인을 위해 연습용으로 죽일 것인지 의논한 후 사격연습용으로 수십명씩 데려다가 사살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군경가족이라 거짓말을 해 간신히 목숨을 건지셨고, 이모 둘은 신촌에 시집가 있던 큰 언니집에 출타 중이라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 날 이렇게 빨갱이로 몰려 죽은 북촌리 주민은 400명에 이른다. 아기들만 약 20명이라 하니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학살은 계속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풀릴 때까지 7년의 시간을 두고 3만명이 넘는 무고한 제주도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왔다. 어머니는 4.3 얘기 끝자락에 항상 “난 국민학교 동창이 어서(없어). 다 죽어버련 그때.” 그리곤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손을 얼굴에 갖다 댈 때면 내 눈에 비친 농사와 물질로 거칠어진 손가락들이 같이 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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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준 (제주 4.3 유족회 미주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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