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일제의 여순 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신지 109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 날을 맞아 32년이라는 짧은 일생을 불꽃처럼 사르고 떠나신 의사의 발자취에서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귀한 가르침을 찾아보자.
안중근은 순흥 안씨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6세때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사하고 16세 소년일때 아버지를 따라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무장폭도들을 진압하는 의기를 드러냈다. 주목할 점은 불과 16세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위험천만한 무장폭도 진압에 나선 그 아버지의 결단에서 개인과 가족의 안전보다는 이웃과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희생과 헌신의 리더십 정신을 읽게 된다.
한말 국가 수난기에 안중근 의사가 접경지역인 만주 간도 지방과 러시아령 연해주(블라디보스톡)를 기반으로 무장 항일운동을 펼친 반면 같은 순흥 안씨 안창호는 미국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여 한인 개화와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을 위한 영재교육을 추구하였다.
이 대목은 1906년 안중근이 28세때 부친 사망으로 가장이 되자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하고 가산을 기울여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한 사실과 절묘한 짝을 이루어 교육의 가치를 첫째로 여겼던 순흥 안씨의 뿌리 깊은 전통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19세 되던 해에 프랑스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어 함께 순회전도를 하였는데 이 때 안중근은 세계를 내다보는 안목을 넓혔을 것으로 보인다.
29세가 되던 1907년 8월, 일본이 한국군을 강제해산하고 무단통치를 강화하자 안중근은 국내 국권회복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북간도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기를 쓰고 형의 망명길을 반대하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은 끝내 형의 굳은 결심을 꺾지 못하고 남문 밖까지 나와 전송을 하였다. 이 때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간곡한 당부를 남겼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단합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겸손의 미덕이 적고 허위와 교만으로 일을 처리하며, 남의 위에 있기를 좋아하고 남의 밑에 있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들이 마음을 비우고 좋은 것을 배워 익히고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중하며 사회에 해독을 끼치지 않기를 바란다. 삼흥학교는 힘써 유지하도록 해야 하며 실제 효과를 거두기 바란다. 하느님이 화(禍)를 내린 것을 후회하실 때면 우리들도 나라를 되찾을 날이 오게 될 것이고, 우리 형제들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나의 뼈를 어디서 찾을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실로 우리를 부끄럽고 또 숙연케 만든다. 앞의 전반부는 우리 민족성의 단점을 구구자자 날카롭게 지적한 명언으로 100년이 흐른 오늘의 한인 심리상태를 질타하며 각성하는 지극히 귀한 교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면 나의 뼈를 어디서 찾을지 알 수 없을 것이다’는 한 맺힌 말에서는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묻어나 숙연한 맘이 든다.
북간도에 도착한 안중근은 37개월 동안 무장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일제가 용정에까지 헌병지대를 설치하고 무장경계를 강화하자 다시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이제 1910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나라의 철천지 원수 이토를 결살하시던 안 의사의 극적인 장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스스로 쓰신 안응칠 역사에 보면 안 의사는 이토의 모습을 모른채 하얼빈 역에서 마주쳤다.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긴 조그마한 늙은이가 염치도 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것이 틀림없는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라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단총을 뽑아 들고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네 발을 쏘았다”라고 기록하셨다.
나중에 검사를 해 보니 이토를 향해 쏜 총알 3발은 정확히 모두 적중하여 이토의 시체 안에 박혀 있었고 나머지 세발은 뒤따르던 일본 고관 3명을 한방씩 차례로 명중시켰다. 실로 천하의 명사수이셨던 것이다. 안 의사는 경황중에 이토에게 세발을 쏘시고 네발로 착각하신듯하다. 이렇게 대한 남아 안중근은 뜻을 이루고 2천만 대한국민과 5억 중국인의 찬사를 받으며 세계에 한인의 독립의지를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마지막으로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말씀을 살피며 끝을 맺기로 한다.
사형집행 14일 전인 1911년 3월 12일 동생 정근과 공근이 검사국에 출두하여 면회를 신청하고 어머님의 말씀을 전했다. 내용인즉, “앞으로 판결선고가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속히 하나님 앞으로 가라”는 실로 보통의 어머니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당부이었던 것이다.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 가슴이 멍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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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 교육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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