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운 우유에 식초 더한 뒤, 물기 빼고 소금 뿌리면 치즈로, 과채류 더하면 맛있는 디저트
▶ 우유·설탕을 보글보글 끓여, 베이킹소다 넣고 졸이면, 빵에 발라먹는 둘체 드 레체 잼
우유를 따뜻하게 데운 뒤 향신료와 설탕을 넣어 차로 즐기거나 오래 끓여 치즈나 잼으로 먹을 수 있다.
1982~1983년으로 기억한다. 우연찮은 기회로 KBS에 견학을 갔다. 당시 인기였던 괴수가 등장하는 인형극(열심히 검색을 해 보았으나 딱히 실마리가 될 만한 자료가 없다)의 제작 과정을 유리 너머로 지켜본 뒤 카페테리아 같은 데 앉아서 음료를 마셨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나의 선택은 우유였다. 차가운 걸 기대했으나 의외로 따뜻하게 데워진 게 나왔고, 어른들이 환담을 나누느라 주의를 덜 기울이는 사이에 거의 금지되다시피 했던 식재료인 설탕을 탁자 위의 통에서 한 티스푼 수북하게 담아 더했다. 덕분에 데워서 단맛이 더해진 것은 물론, 데워 좀 더 도드라지는 우유 냄새도 균형이 맞아 한층 더 맛있었다. 좀 전에 보았던 인형극 제작 과정 같은 건 말끔히 잊은 채, 우유가 영원히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며 홀짝홀짝 마셨다.
우유를 공급해 주는 젖소의 한 종류인 홀스타인.
스타인 종보다 유지방 함유량이 높은 저지.
흰 우유에 홍차와 향신료, 설탕을 넣어 끓인 마살라 차이.
달콤한 데운 우유 생각날 땐 ‘마살라 차이’
따뜻하고 달콤했던 KBS 우유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요즘은 마살라 차이(홍차와 우유, 인도식 향신료를 함께 넣고 끓인 음료)를 끓인다. 마크 쿨란스키의 저서 ’우유-1만년 동안의 난리법석’에 실린 레시피를 소개해보자. 마크 쿨란스키는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촘촘한 음식 문화사 책을 쓰는 저자로 한국에도 대표작이자 베스트셀러인 ‘대구’와 ‘소금’이 번역 출간되었다. 최신작인 ’우유’에서는 사료이면서도 실용적인, 즉 실제로 따라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레시피가 드문드문 등장한다. 그 가운데 마살라 차이가 가장 따라 하기 쉽다. 우유 다섯 컵(1,200㎖)를 기준으로 정향 6~8개, 카르다몸 8개, 계피(본보 2018년 12월 22일자 참고) 긴 것 1쪽, 간 생강 1작은술, 회향씨 1작은술, 찻잎 6큰술, 설탕 150g을 준비한다.
큰 냄비에 물 1,500㎖를 담아 중불에 올린다. 향신료는 전부 가루를 내어 물에 더한다. 2분 끓인 뒤 찻잎을 넣고 1분 더 끓인 다음, 약불로 줄여 5분 더 보글보글 끓인다. 이제 우유를 더한다. 차가운 우유가 끓는데 시간이 좀 걸리므로 다시 중불로 올렸다가 끓을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약불로 줄여 2분 더 보글보글 끓인다. 불을 끄고 설탕을 더해 잘 섞은 뒤 고운 체에 내려, 뜨거울 때 잔에 담아 마신다. 너무 달다 싶으면 다음에 끓일 때 설탕의 양을 조절한다. 마살라 차이에는 대체로 향이 진하고 강렬한 아삼 홍차를 쓰지만 카슈미르 지방에서는 녹차를 우린다.
강렬한 향과 달콤함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드는 차이를 마실 때마다 기억을 되새긴다. KBS의 따뜻한 우유는 왜 그리도 맛있었을까. 근사한 탁자에 앉아서 마셔 그랬을까. 사실 나는 데운 우유를 싫어했다. 빨간 플라스틱 상자에 빼곡하게 담겨 있던 흰색 바탕에 파란색과 녹색의 우유팩, 급식 우유 말이다(공장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경기 수원의 급식 우유는 해태 제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유를 싫어하지 않고 가정교육 덕분에 ‘딸기와 초콜릿은 가짜, 흰 우유가 진짜’라는 인식이 각인되어 있었던 지라, 나는 급식 우유를 기꺼이 즐기는 소수였다. 하지만 이런 나마저도 급식 우유는 즐겁게 마실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반 강제 급식이었으니 많은 양을 들여오느라 신선함이 느껴질 만큼 차가운 경우는 거의 드물어, 우유는 대체로 상온보다 조금 낮은 온도였다. 그마저도 겨울이 되면 상자 채로 뜨거운 물에 담가 미지근하게 데워 돌렸다. 당시에는 온도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수치로 기억은 못하지만, 정말 우유가 가장 맛없게 느껴지는 미지근함 이랄까. 이런 요인들이 한데 맞물려 많은 아이들이 반 강제적인 우유 급식에 트라우마를 품게 되었다.
자식이 없어 요즘 돌아가는 사정을 체감은 못하지만 찾아보니 트라우마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이다. 우유 급식을 하는 초등학교에서 아침에 먹고 3교시쯤 연쇄 구토를 한다거나, 소화가 안 되어 먹을 수가 없으니 책상 서랍에 숨겨 두었다가 상해 터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75%가 유당을 소화시키지 못해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픈 유당 불내증을 지니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래저래 당위성을 느끼지 못한 채 단지 영양을 위해 타의로 먹어야 한다면 누가 자라서 우유를 선택할까. 게다가 유가 연동제로 인해 우유의 가격은 원유의 두 배 수준으로 비싸다. 품질에 비해 비싸다는 말이다. 이 모든 사정이 한데 맞물려 소비가 안 된다는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쭉 나왔다. 이런 우유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유의 정수만을 뽑아 농축시킨 코티지 치즈에 꿀과 과일을 곁들이면 디저트가 된다.
우유의 변신, ‘코티지 치즈’와 ‘둘체 드 레체’
그래서 길을 찾아보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컵에 담아 하루 한 두잔 마시는 우유 섭취와는 조금 다른 길이다. 그보다 더 많은 양을, 무엇보다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길을 두 갈래로 소개한다. 둘 다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조리법은 아니지만 우유에서 정수만을 뽑거나 농축시킨다는 차원에서 더 많이, 한꺼번에 소비할 수 있어 바람직하다. 첫 번째는 코티지 치즈(Cottage cheese)이다. ‘오두막’이라는 뜻의 ‘코티지’가 이름에 붙었듯 농가 혹은 목장에 딸린 오두막에서 즉석으로 만들어 먹은 치즈를 의미한다. 그만큼 만들기 쉽다. 기원전 3,100~510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양의 위에서 만들어진 치즈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일단 우유를 아주 넉넉히, 4리터 준비한다. 그밖에 식초 3/4컵, 꽃소금 1½작은술이 필요하다. 일단 넉넉한 크기의 냄비에 우유만 담아 중불에서 섭씨 50도까지 온도를 올린다(20화에서 온도계를 살펴 보았으니 독자 여러분도 어느 정도 마음 및 도구의 준비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온도가 오른 우유가 튀지 않도록 식초를 천천히 따라 더한 뒤 1, 2분 살며시 휘젓는다. 몽글몽글한 응유(Curd)가 노란 유청(Whey)에 몽글몽글하게 맺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대로 뚜껑을 덮어 30분 동안 둔다.
30분이 지나면 체에 면포(만두에 넣는 두부의 물기를 짤 때 쓰는)를 받쳐 응유만 남긴다. 면포의 네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들어 아직 따뜻한 응유를 감싸, 그대로 흐르는 수돗물에 식힌다. 최대한 물기를 꼭 짜낸 뒤 대접에 담고 소금을 솔솔 뿌려 잘 섞는다. 이때 뭉친 응유를 잘게 부숴주면 한층 더 먹기 편하다. 바로 먹어도 좋지만 밀폐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차게 두면 더 맛있어진다. 먹을 때 생크림을 두어 숟갈 더해 버무려주면 한층 더 고소하고 부드러워진다. 꿀을 약간 끼얹고 딸기나 오렌지, 포도, 토마토 등 과채류를 곁들이면 간식을 넘어서 간단한 디저트로도 제 몫을 충분히 한다. 한꺼번에 많은 우유를 쓰는 게 핵심이니 마트 등에서 ‘두 개 들이 한 묶음’ 등의 기획상품을 활용하기 딱 좋다.
두부가 콩물의 단백질을 간수로 모아 응고 시킨 음식임을 감안한다면, 만두소에 두부를 쓰듯 이탈리아의 만두인 라비올리의 소로 코티지 치즈를 쓸 수 있다. 물론 유청에서 단백질을 걷어 낸 이탈리아의 리코타 치즈를 쓰는 게 정석이지만 소량 만들 거라면, 또한 피를 반죽해 밀어 라자냐 같은 음식을 만든다면 코티지 치즈를 직접 만들어 채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데쳐 물기를 꼭 짠 뒤 곱게 다진 시금치(혹은 한국의 재료를 접목해 취나물)나 푹 삶거나 구운 단호박 등에 더해 쓴다. 버터에 로즈마리 등을 볶아 향을 더한, 간단한 소스가 라비올리에 잘 어울린다.
좀더 은근히 그리고 오래 끓여 본격적인 디저트 재료로서 우유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다. 우유 1리터와 설탕 340g, 바닐라 추출액 약간, 베이킹소다 ½작은술을 준비한다. 우유와 설탕을 4리터 들이 안팎의 넉넉한 냄비에 담아 중불에 올린다. 주걱으로 천천히 저으며 보글보글 끓여 설탕이 완전히 녹으면 베이킹소다를 더하고 잘 섞는다. 뚜껑을 덮지 않은 채로 불을 최대한 약하게 줄인다. 가끔 저어 가며 아주 진한 갈색을 띄고 1컵 분량으로 졸아들 때까지 1시간30분에서 2시간 끓인다. 눈이 고운 체에 내린 뒤 유리병이나 밀폐용기에 담는다. 우유잼이라 할 수 있는 ‘둘체 드 레체(Dulce de leche)’가 완성됐다. 우유에 설탕을 더해 끓임으로서 마이야르 반응(캐러멀화 반응)이 일어나 색도 진해지도 맛도 복잡해지는 둘체 드 레체는 스페인어로 ‘우유(로 만든) 사탕’ 혹은 ‘캐러멜’이라는 의미이다. 설탕을 태우기 직전까지 끓인 뒤 크림을 부어 만드는 캐러멜보다 시간은 좀 더 걸리지만 훨씬 안전하다. 한 달까지 냉장 보관이 가능하니 빵이나 크래커 등에 바르거나 찍어 먹어도 좋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끼얹어 먹어도 맛있다.
홀스타인과 저지 우유
우리가 지금까지 먹어 온 우유는 모두 홀스타인 종 소로부터 나온 것이다. 젖소의 상징 같은 흑백 무늬가 특징인 홀스타인은 네덜란드 노르트홀란드와 프리슬란트 주,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등에서 비롯된 품종으로 생산량 증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유 맛의 척도 가운데 하나인 지방 유지방 함유량이 3.7%이다. 뛰어난 생산성 덕분에 전세계에 걸쳐 대표 젖소로 자리 잡은 가운데 요즘은 맛을 위한 저지 종의 우유가 조금씩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영국령 채널 군도 저지 섬의 토착 품종인데, 영국보다 가까운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1700년 전후로 독립 품종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갈색의 털을 지녀 한우와 얼핏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 저지는 홀스타인에 비하면 덩치가 작고 우유의 생산량도 적지만 유지방 함유량은 4.84%로 월등히 높다. 유지방 함유량이 높으니 더 느끼할 것 같지만 오히려 맑고 가벼운 가운데 해상도가 높다는 느낌을 받는다. 국내에서도 서울우유가 몇몇 시험 매장에서 한정 판매 중이지만 가격이 일반 우유의 다섯 배 이상이다.
우유의 일족 분유, 가당 및 무당연유
대체로 우유는 잘 상하는 식품이라 여기지만 장기 보관도 가능한 가공품이 몇 있다. 일단 멸균 우유는 이름처럼 살균을 넘어 아예 멸균을 시켜 버렸으므로 3개월 상온보관이 가능하다. 한편 우유를 말려 가루 상태로 가공한 제품이 이름처럼 분유인데 지방도 걷어 내면 탈지분유, 걷어내지 않으면 전지분유가 된다. 우유 대용으로 물에 타서 마실 때에는 전지분유, 제과제빵에는 탈지분유를 쓴다. 마지막으로 액체 상태이지만 고온에서 우유의 수분을 60% 가량 걷어내 걸쭉하게 만든 연유가 있다. 여름철 빙수에 올라가는, 단맛이 강한 것은 40~45%까지 설탕을 더한 가당연유(Condensed milk)이고 더하지 않은 것은 무당연유(Evaporated milk)이다. 일단 단맛부터 확연히 차이가 나 둘은 서로의 대체재로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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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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