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아들이 친일파의 길을 걸어갔다고 비난하는 글을 읽으며 이런 글을 쓰는 나의 양식을 의심하게 된다. 안 의사의 큰 아들은 어린 나이에 독살을 당했는지 이름 모를 사인으로 죽었다. 둘째 아들은 친일파의 길을 걸어갔다고 비난하는 기자에게 나는 “너라면 어찌 살았겠느냐” 묻고 싶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처럼 의롭게 살다가 죽었어야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 기자는 너무 잔인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싶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안 의사의 유족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낼 수 없었고 따뜻한 손길은 일본경찰에 찍히고 말 상황에서 유족들은 가난하게 살아야했고 초근목피로 삶을 지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 40년, 누군가 제대로 숨 쉬며 살 수 있었겠는가? 조선에서 살던 조선인들은 모두 망명해 살도록 선처가 있었겠는가?
상해임시정부가 지리멸렬하며 겨우 숨쉬다 해방을 맞았고 돌아온 김구와 그 일행은 조선 땅에서 살던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갔다. 그들을 해방된 조국으로 오게 한 고하 송진우가 조선호텔에서 있었던 환영만찬 후 금일봉을 전할 때 김구의 가장 가까운 비서는 “더러운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송진우는 “이 나라에는 더러운 돈도 있고 깨끗한 돈도 있고, 깨끗한 돈만 있을 수 없다”고 대응했다. 백범 김구는 그 금일봉을 받았다. 이 비화는 송진우의 측근이었던 내 아버지로 부터 들은 이야기다.
3월 1일이 오면 민족을 애국자와 친일파로 갈라놓는 기자들이 있고 사상가가 있고 지성인들이 있다. 민족은 애국자와 친일파로 갈라질 수 없다. 민족은 그 안에 악당도 있고 도둑놈도 있고 착한 사람도 있고 천사도 있다.
기미년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 이제 친일파를 용서하는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길 희망한다. 해방 후 70년 아직도 민족을 두개로 갈라놓는 무리들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친일의 행적을 지금도 샅샅이 찾아내서 친일파를 단죄하려는 무리에게 나는 그 친일파 속에 수많은 애국자들이 있다고, 그들을 변호하고 싶다.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심장부에서 조선독립선언서에 서명한 11명 중에 두 사람이 친일파로 분류되었고 몇 사람들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로 분류되어 있다. 목숨을 내놓고 적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청년들, 그들은 역사에 남을만한 위인들이다.
인도의 간디가 영국의 수도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던가? 남미의 어느 애국자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서 독립만세를 외첬는가? 인류 역사에 그런 용감한 청년들은 다시없었다.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몇몇은 이미 친일파로 불명예스러운 사람들이 되었다. 2월 8일 독립선언서와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쓴 춘원과 육당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자. 욕될만한 흔적이 발견되었다면 용서하자. 그들이 왜 친일을 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어느 상황에서 조선청년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연설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기쁘게 그런 연설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고, 그 연설을 일본에서 들은 분이 그의 회고록에서 썼다.
십자가를 지고 친일파가 된 분도 있다. 주어진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조건을 찾아서 친일파가 된 분도 있다. 100년 후 함부로 누구를 단죄하지 말아야 한다. 비난하기는 쉽다. 오늘의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100년전의 상황을 돌이켜 볼수 있어야 한다.
애국자를 기리는 일, 훌륭하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를 말하면서 친일한 그의 아들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친일파가 된 아들의 아들을 만나 교우한 적이 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안중근의 손자인 안웅호. 그는 할아버지의 총이 열 발 중 다섯 발은 제대로 나가지 않는 총이었다고 말하며 그 총으로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을 하늘이 내린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아침 할아버지 사진 앞에서 묵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손자가 1990년 할아버지 순국 80주년 기념식 참석차 한국에 갔다가 여의도 63빌딩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며 쓴 시 한편을 내가 번역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 중 미국으로 건너와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20년 의사생활을 마치고나서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트 교외 토지 개발자로 성공한 손자는 중국계 아내와 살고 있었다. 그 손자도 지금쯤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어렵게 한 시대를 살아간 위인의 가족을 위로할 수 없다면 용서라도 하자. 민족이란 말 속에는 분열이라는 말 대신 용서라는 말이 들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안중근 의사의 손자는 언제나 조부의 음성을 들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조부의 음성은 언제나 “초월하라, 초월하라” 였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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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 시인, 버지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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