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은 ‘대통령의 날’이었다. 초대 조지 워싱턴 생일(2월18일)과 16대 아브라함 링컨 생일(2월12일)이 뭉뚱그려져 연휴가 된 연방 공휴일이다. 정월대보름이었던 다음날(19일)은 이들 두 대통령 못지않게 위인으로 꼽히는 32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연관이 있다. 그의 생일이 아니다. 그가 16년의 혁혁한 치적 중 일생일대의 패착을 둔 날이었다.
루즈벨트는 1942년 2월19일 행정명령 9066호를 발동했다.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지 2개월여 만이다. 군대가 작전지역 내 민간인들을 강제 소개시키도록 한 이 명령에 따라 캘리포니아·워싱턴·오리건 등 일본과 가까운 서해안에 살고 있던 12만여명의 일본인 이민자들이 내륙 오지의 10개 수용소에 갇혀 전쟁이 끝날 때까지 3~4년간 죄수로 살았다.
일본인들은 이날을 ‘회억의 날(Day of Remembrance)’로 부른다. 미국 연방공휴일인 현충일(Remembrance Day)과 글자가 같다. 적국(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상들을 재판도 없이 장기 구금한 어두운 역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다. 600만명의 조상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나치를 ‘용서하되 잊지 않겠다’는 유대인들의 결의와 마찬가지다.
당시 연방의회는 물론 전국 유력지들도 루즈벨트의 행정명령을 적극 지지했다. 피해자가 가장 많았던 캘리포니아의 최대 일간지 LA타임스가 특히 심했다. 이 신문은 당일 사설에서 “그들(일본인)을 그냥 두고는 하루도 평안할 수 없다”고 했고, 12월8일자 사설에선 “역사상 유례없는 반역민족인 왜놈(Japs)들을 수용소에서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은 회억의 날에 앞서 1월30일을 ‘프레드 코레맛스의 날’로 정했다. 코레맛스는 강제수용을 피하려고 이름을 미국식으로 바꾸고 ‘째진’ 눈도 성형수술 했지만 성과가 없자 인권투사가 됐다. 강제수용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끈질기게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번번이 패소했고 결국 1944년 연방대법원에서도 6-3으로 패배했다. 1월30일은 그의 생일이다.
지난 주 연방의회에 ‘코레맛스-타카이 인권보호법’이 상정됐다. 발의자인 3명의 아시아계 의원들은 앞으로 인종이 이유가 된 미국시민의 강제구금은 법으로 막아야 한다며 “특히 무슬림의 미국입국을 금지시키고 국경장벽을 쌓아 멕시코인의 밀입국을 막아야 한다며 국민을 선동하는 인종차별적 성향의 대통령 치하에서는 이 법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회억의 날에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2015년 대선 캠페인 당시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계 시민 강제수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런 개념을 분명히 싫어한다. 그러나 내가 당시 그 상황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해 강제수용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코레맛스에 패소 판결을 내린 연방대법원은 지난해에야 잘못을 시인하고 판결을 뒤집었다. 하지만 강제수용이 전쟁이 아닌 인종 문제임은 이미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특별 조사팀이 내린 결론이다. 뒤를 이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8년 민간보상법을 제정, 강제수용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함께 1인당 2만달러(현재 4만2,000달러 상당)씩 보상했다.
루즈벨트의 행정명령을 쌍수를 들어 지지했던 LA타임스도 올해는 정반대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 일본계 시민들의 강제수용은 재언의 여지가 없는 불법이며 당시 연방정부 지도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군사적 필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가 아니라 ‘인종편견, 전쟁 강박관념, 정치 지도력의 결핍’이 빚어낸 결과였다는 카터 조사단의 보고서 내용을 인용했다.
‘코레맛스-타카이 법’의 타카이는 강제수용을 앞장서 비판했던 고 마크 타카이 하원의원(하와이)을 지칭한다. 2년 전 상임위도 통과 못한 이 법이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한 올해엔 의회를 통과할 수도 있지만, 법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아직도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일본인의 강제수용을 두둔한다. 77년 전의 만행은 다른 형태로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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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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