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날의 파티에서 받은 선물들을 풀고 있던 성탄절 아침이었다. 예쁜 리본 등으로 장식된 포장지를 하나하나 벗기니 콜크 마개로 덮인 올리브유, 연두와 초록색 행주, 유기농 설탕, 스위스산 소형 과도와 식기 건조 패드, 커피 문양의 앞치마, 벨기에산 초콜릿, 핸드크림, 브로치 등이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이어서 마음에 든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좋아서 싱글벙글하는 나를 옆에서 보고 있던 남편이 “난 더 비싼 거 사줘도 욕만 먹고 고맙단 이야기도 못 들었는데…” 하며 볼멘소리를 한다.
예물시계를 잃어버려 상심하고 있던 어느 날이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남편이 무엇인가를 툭 던지며 “이것도 잃어버리기만 해봐. 그럼 이제 다시는 안 사줘” 한다. 내동댕이쳐진 봉투안 상자를 열어보니 잃어버린 것보다 더 좋은 고급 시계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계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이런 귀한 선물을 그렇게 실망스럽게 받아야 하는 것이 속상했다. 마치 기대했던 소풍이 우천으로 취소되었을 때의 기분 같았다. 내가 무슨 브랜드를 좋아하는지 어떤 디자인의 시계가 갖고 싶은지 물어본 적도 없었고 그날은 특별한 날도 아닌 데다가 순대 봉지 내팽개치듯 던져준 그 선물은 나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안 받아도 되니 반품해요”라고 상자를 덮어 내려놓고는 다시 설거지를 했다. 남편은 의외의 반응에 실망했던지, 아니면 놀랐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선물이란 내가 주고 싶은 물건을 주고 싶을 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주는 것으로서 비싸면 비쌀수록 좋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남편과 ‘선물이란 상대편이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을 의미 있는 시간에 정성스럽게 전달해야 하며 받는 자의 기쁨은 가격과 상관없다’라는 나의 가치관이 서로 부딪힌 날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선물이란 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이 크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최소의 비용으로도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오늘의 선물은 가격 대비 효과율, 즉 가성비가 아주 낮다”고 일침을 가했다. 결국 남편이 사 온 시계를 차게 되었지만, 끝까지 “고맙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이후 남편은 선물에 관한 한 내 말을 유념해서 행동하려 꽤 노력하는 편이다. 남편이 석 달간의 영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며칠 후 우리집에서 성탄 파티가 있었다. 선물을 주고받는 시간이 되어 저마다 꾸러미를 준비하고 둘러앉았는데 남편이 “여러분, 제가 우리 모임 여성분들에게 명품 가방을 선물하겠습니다. 영국에서 사 온 겁니다” 하며 큰 봉투를 가져왔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져 남편만 바라보고 있는데 한참 봉투 속을 뒤지더니 무엇인가를 꺼내 높이 쳐든다. 황금색 샤핑백이다. 자세히 보니 버버리 회사 것이다. 모두가 손뼉을 치며 “맞네. 명품 가방!” 하며 자지러지게 웃는다.
남편이 영국, 버버리 상점에 친구가 부탁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샤핑백을 보니 너무 예쁘더란다. 성탄 시즌 때만 나오는 버버리 상표가 음각된 황금색의 번쩍거리는 샤핑백을 본 순간 얼마 후 있을 성탄 부부 모임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남편은 점원에게 샤핑백 7개를 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점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남편이 상황 이야기를 했고 결국엔 기분 좋게 7개의 샤핑백을 받아 나올 수 있었다.
백 안에 영국 방문 기념 열쇠고리가 하나씩 들어있었지만, 그것은 남자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결국은 빈 봉투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곱명의 여자들은 모두 함박웃음을 띠며 황금색 샤핑백을 어깨에 메고 너무 좋다고 마음에 꼭 든다며 어떤 선물보다 더 고마워했다. 이렇게 남편은 그날, 모두에게 ‘웃음 한 보따리’를 선물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만날때마다 “명품가방 집에 고이 모셔놨어요.” “ 언제 한번 모일 때 다 메고 옵시다.” “ 성탄에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하며 깔깔거린다.
남편이 드디어 선물에 대해 제대로 파악한것 같다. 떠올리면 미소짓게 되는 유쾌한 추억은 낡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선물이 될 터이고 이것은 그야말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치의 행복을 만들어낸 가격 대비 효과율, 즉 가성비가 아주 높은 선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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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숙 워싱턴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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