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여름 설조 스님과 첫인연
▶ ‘통도사 동안거’ 대신 여래사행
샌프란시스코 여래사에 생기가 돈다. 신도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한국으로 간 설조 스님은 돌아올 기약이 없고 주지 소임을 맡으러 온 스님들은 짧게는 달포쯤 길어야 석달쯤 머물다 떠난 탓에 그래서 행여 스님 없는 절이 될까 걱정하던 차에 광전 스님(사진)이 왔으니 너나없이 기뻐할 수밖에. 게다가 청정수행의 표본으로 추앙받는 청화 큰스님을 꽤 오랜 세월 지근거리서 시봉한 상좌인데다 가시덤불 돌무더기 사이로 듬성듬성 나무 몇그루뿐인 남가주 허허벌판에 번듯한 금강선원을 세우고 북가주 삼보사에서 몇 철을 지내는 등 미국 사정에도 밝고, 학력(중앙승가대, 동국대 대학원)과 경력(성륜사 주지, 광륜사 주지, 백운암 주지, 백양사 주지대행, 교육원 연수국장과 사서국장, 총무원 총무국장, 원로회의 사무처장, 중앙종회의원 등)이 엄청난 스님을 모시게 됐으니 신도들이 어깨를 들썩일 수밖에.
그런데 의외다. 설조 스님과 광전 스님의 인연 말이다. 설조 스님의 상좌들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맡지 못한 여래사의 지휘봉을 다른 문중 스님이 맡게 된 것도 특이한데 두 스님이 처음 만난 건 1년도 안됐다. 첫만남에서 여래사행까지 치면 반년도 안된다.
“작년 여름 설조 스님께서 조계사에서 단식정진하실 때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제가 속해 있던 중앙종회의 야당격인 법륜승가회의 종책위원장 겸 대변인을 맡고 있을 때라 단식을 시작하실 때도 저희가 조계사 법당에 모시고 갔었고, 여러 차례 지지성명도 발표하고 설조 스님과 종단 개혁에 뜻을 같이 했었습니다. 그후 10월에 미시건 앤아버에 있는 University of Michigan Ann arbor의 한국학 센터에서 주최한 행복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에 초청받아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오래 전 좋은 추억이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3일간 스탑오버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디트로이트행 비행기가 아침 이른 시간이라 여래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설조 스님께서 여래사에 계셨고 떠나는 날 아침에 제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가라 하셔서 전화번호를 남겨 놓았는데 며칠 뒤 한국에 도착해 보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는데 설조 스님께서 연락하신 것이었습니다. 11월 초에 설조 스님께서 한국으로 귀국하신 뒤 찾아뵙기로 하고 통화를 마쳤는데 설조 스님의 상좌이신 나주 운흥사 주지 혜원 스님께서 연락 주셔서 여래사를 제가 맡아주었으면 한다는 설조 스님의 말씀을 전해주셨고 자세한 이야기는 11월 초에 설조 스님을 뵙고 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광전 스님은 동안거를 위해 통도사에 방부까지 들여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연의 물꼬는 그를 여래사로 향하게 했다.
“11월 초에 서울에서 설조 스님을 뵙게 되었고 여래사를 맡아달라는 간곡한 말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만, 당시 저는 통도사선원에 동안거 방부를 들여 놓은 상태였고 여래사에서 하룻밤 지낸 인연밖에 없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설조 스님께서는 당신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은 한국에서 종단개혁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칠 테니 미국 여래사는 제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거듭 하셨습니다. 설조 스님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저버리지 못하고 통도사행은 취소하고 여래사에서 석달 동안거를 지내기로 하고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여래사에 오게 되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여래사에서의 석달간 광전 스님은 무엇을 느꼈을까. 아쉬운 점은 없을까.
“저에게 여래사에서 보낸 3개월은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법회가 아니면 특별한 일이 없는 미국 절의 특성상 개인시간이 많아 하루 2시간은 꼭 걸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혹한의 한국과 달리 온화한 날씨와 좋은 공기를 만끽하면서 한 철을 잘 지냈습니다. 석달동안 이곳에서 지내면서 여러 불자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오랜 이민생활을 하신 분들이라 다들 소신이 뚜렷하시고 개척정신이 탁월하신 분들이라 자기주장이 강하셨습니다. 북가주 절들이 생기고 없어지고 스님들이 오셨다 가신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먼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스님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점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소수인 불자들끼리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반목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소음이 워낙 심한 공항 근처 사찰이라 불편하지 않을까. 좀 고즈넉한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광전 스님은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성급한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처음 한 달은 귀마개를 해도 밤에 두 세 번씩은 잠을 깨곤 했는데 지금은 서서히 적응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제가 여래사에 온지 석 달 만에 이전을 운운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시간이 좀 지나고 여래사의 구성원들과 상의해 동의한다면 이전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전에 여래사의 운영방향과 역할 그리고 북가주 다른 절들과 역할 분담을 고려해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님 스토리에 이 질문이 빠질 수 없다. 출가동기. 실은 이것이 첫질문이었다.
“저는 중학교 시절부터 은사이신 청화큰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의 모임인 금륜회 학생부에서 활동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시에는 광주 원각사 고등부 활동과 고등학교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었고 그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출가당시엔 출가이외엔 아무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큰스님처럼 훌륭한 수행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큰스님을 뵙지 못했다면 출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전의 청화 큰스님을 먼발치서 단 한번 친견하고도 그 감격, 그 감화력을 두고두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긴 세월 큰스님을 직접 시봉한 광전 스님에게 감회가 없을 리 없다.
“저희 스님께서는 진정한 수행자이셨습니다. 자기 자신에겐 더 없이 엄격하셨고 다른 사람에겐 더 없이 자비로우신 어른이셨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써 더 이상 완벽한 분을 아직까지 뵙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 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향기 나는 아름다운 수행자가 이 생을 치열하게 사시다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청정수행승의 제자 광전 스님이 종단행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게 된 인연은 또 무엇일까.
“은사스님 살아 계실 때에는 학교 다니고 시봉하느라 세월을 보냈고, 은사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은사스님께서 창건하신 서울 도봉산 광륜사 주지를 맡게 되었습니다. 주지 소임이 끝나갈 무렵 당시 조계사 주지 소임을 보고 있던 토진 스님(맏 사형 월성 스님의 상좌, 조카상좌)의 제의로 교육원 연수국장에 추천되어 종단 소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국제선센터 국제국장, 한국불교연수원 사무국장, 총무원 사서국장, 총무국장을 끝으로 종단 소임을 그만두려 했으나 그 당시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추천으로 원로회의 사무처장 소임도 4년 보게 되었습니다. 백양사 부주지 소임을 보던 중 주지스님이 갑작스럽게 사직하게 되어 백양사 주지 직무대행도 1년 가까이 보게 된 일도 있읍니다만 다 인연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종단행정의 경험을 쌓게 된 것도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밖에 최근 답보상태에 빠진 듯 보이는 종단개혁운동,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종단운영체계 등에 대해서도 광전 스님은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적당한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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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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