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용의 민주화운동 비망록5
▶ 김대중 납치사건과 미주 민주화 진영의 결집
김대중 씨가 73년 8월14일 동교동 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정기용 자유광장 대표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그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한 6.3사태를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 새겨진 길고 긴 저항의 산맥을 종주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갈구한 시대에서 그는 화려한 주역은 아니었지만 번민하는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충실한 투사였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온전한 개인사라기보다 주관적인 대한민국의 현대사이며 미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덧붙여 그가 산수(傘壽)의 세월 동안 주유(周遊)해온 애주와 명사들과의 교유의 흥미로운 기록이다.
-DJ 납치 소식에 암살 우려
동경 발(發) 급보가 전해졌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 씨가 백주 대낮에 동경 한 복판의 호텔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모두들 경악했다. 사건의 실체는 오리무중이었다.
미국은 물론 유럽, 일본의 언론들은 저마다 대서특필했다. 일본 언론들은 ‘납치’에 비중을 뒀다. 배후에 KCIA가 있다는 추측보도도 나왔다. 한국에서는 보도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박정희의 라이벌인 김대중의 실종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 워싱턴의 한민통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즉각 행동에 나섰다. ‘납치’가 분명해 보이는데 심증만 있을 뿐이었다. DJ의 안위를 걱정하며 매일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문은 강영채 씨가 작성해 미 언론 등에 전했으며 한글은 내가 맡았다. 우린 DJ가 암살당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를 살려야 했다. 저마다 인맥을 찾아 미국 각처에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DJ 구명 도운 미국인들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한 인물은 도널드 레나드(Donald L. Ranard)였다. 4.19 당시 주한 미 대사관 참사관을 지냈던 그는 한국을 잘 이해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있는 외교관이었다. 친분이 있던 이근팔 씨가 국무부 한국과장이던 그에게 진상 파악을 부탁했다. 레나드는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를 비판하고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훗날 밝혀졌지만 그는 국무부 상급자들과도 상의하지 않고 움직였다.
보스턴에 거주하던 그레고리 핸더슨에게도 연락이 이뤄졌다. 그는 194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7년간 주한 미 대사관에서 근무한 문관 출신이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사무실에도 연락이 닿았다.
특히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인 린지 매티슨에도 도움을 구했다. 그는 DJ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자 경악했다. 매티슨은 워싱턴에서 국제정책개발연구원(International Center for Development Policy)이란 싱크 탱크를 창설해 인권과 군축, 환경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시절에 김대중이 2차 망명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동행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들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심도 깊게 보도했다. 동경에 상주하던 워싱턴 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뉴욕타임스의 리차드 헬로란, NBC TV의 짐 게논 등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인 언론들도 빠질 수 없었다. 내가 발행하던 ‘한민신보’는 물론 장성남, 신대식, 강영채 씨가 운영하던 ‘자유공화국’, 그리고 LA의 ‘신한민보’ 등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퍼레이드’ 지의 KCIA 기사에 나온 우리 가족(왼쪽), 김대중 납치사건을 규탄하는 한인들.
-동교동과의 국제전화
김대중의 안위를 걱정하던 그의 처남 이성호 씨와 나는 엉뚱한 발상을 했다. “무릇 전쟁에서는 정(正)으로 적과 맞서고, 기(奇)로 승리를 일군다(凡戰者 以正合 以奇勝).” 손자병법의 가르침처럼 정공법을 써 적의 의표를 찌르자는 것이다.
8월13일경 우리는 DJ가 살던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대중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를 잡은 손이 떨려왔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우린 말을 잊었다.
“선생님, 건강 괜찮으십니까?” “우리나라가 이 정도일세. 그래도 국가를 배신하지 말고 비난도 말고 열심히 해보게.” 사지에서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그는 나라를 배신하지 말라는 말을 강조했다. 더 이상의 말은 서로가 할 수 없었다. 전화는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도청되고 기록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DJ와 전화가 연결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DJ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중앙정보부는 왜 통화를 ‘허용’했을까. 해외 전화를 차단하는 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통화를 도청해 해외 연결망을 파악하려는 의도였을까. 지금도 수수께끼다.
-사건 발생 6일만의 보도
8월14일,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한국 언론들은 일제히 “일본에서 괴한들에 납치된 김대중 씨가 5일 만에 서울 자택으로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괴한’의 진실은 가려졌다. 한국 사람들은 비로소 김대중 납치사건을 접했다.
박정희는 스스로 악독한 독재자임을 세계적으로 증명했다. 외신들은 박정희의 정보정치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며 비판했다.
독재의 정신은 늘 민중의 힘을 잊어버리곤 한다. 역사는 힘에 대한, 특히 제어되지 않는 권력에 반작용을 보여주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흩어져 있던 반독재 민주화 세력을 결집시켰다. 박정희의 폭압에 대한 역사적 반작용이었다.
-김재준이냐, 임창영이냐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는 안병국을 위원장으로 한 ‘김대중 보호 한미시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8월17일 DC의 메리디안 힐 공원에서 납치 규탄대회를 열었다. 2백명의 한인들이 모여 백악관 앞을 거쳐 한국대사관 앞까지 가두행진 시위를 했다. “박 정권은 물러가라” “한국 정보원을 축출하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한민통은 구심점인 김대중의 공백으로 인해 조직을 재정비할 필요가 생겼다. 1974년 11월 DC에서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누가 의장을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김대중 의장 추대론과 불가론이 맞섰다. DJ가 반국가 활동을 한 것처럼 핍박 받고 있는 현실이 걸렸다. 불가론자들은 우리도 피해를 입는다고 주장했다. DJ를 명예의장으로 추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전규홍 전 서독대사 추대론도 나왔지만 본인이 사양했다.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총무처장,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의장 후보로 2명이 거론됐다. 한국에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온 장공 김재준 목사와 임창영 전 유엔대사였다. 운영위원회에서는 노선 대립이 생겨났다. ‘선 통일 후 민주론’과 ‘선 민주 후 통일론’이 맞붙었다. 장공은 선 민주론을, 임창영은 선 통일론을 대표했다. 의장 선거에서 절묘하게 동수가 나왔다. 밤새 의논했지만 결론은 쉽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강석원 교수가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자는 제안까지 할 정도였다. 천신만고 끝에 김재준 목사가 의장으로, 부의장 김응창, 사무총장에 이근팔 씨가 선출됐다. 그 후 선 통일론자들은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또 중앙위원에 동원모 교수, 이승만 목사 등 15인을 선임했다. 나는 홍보위원장을 맡았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사람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제적으로 고립된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남발했다. 공포정치의 시기였다.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받다 의문사를 한 것도 이 시기였다. 반유신민주화운동은 점차 ‘박정희 하야’를 주장하는 강경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워싱턴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메카가 됐다.
워싱턴에 파견 나온 언론사 특파원들도 민주화운동을 간접 지원했다. 한국일보의 조세형, 조순환, 뉴욕의 김태웅 특파원, 동아일보의 진철수, 권오기, 이웅희, 강인섭, 남찬순 특파원 등은 국내의 정보를 알려주고 충고도 해주는 등 여러 도움을 줬다. 미주리대에 와 있던 정대철은 한민신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며 활동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주미 대사관의 이재현, 정인식 공보관장과 해병 중령인 최헌식 무관, 강경구 장학관 등은 귀국을 거부하고 망명의 길을 택해 큰 파문이 일었다.
또 언론인 남상천과 박문규 목사, 김재숙, 김상곤, 황옥성, 부성래, 이범동, 민윤기, 방숙자, 윤득중, 박백선, 염인택, 김영훈 목사, 디자이너 이연구, 이재호, 윤귀병, 장성남의 부인 정진옥 등은 열성적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안홍균 선배, 고응표 전 한인회장, 박원혁, 영문학자인 이정우, 의회도서관의 양기백, 한국일보의 유석희 등은 남몰래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믿었다. 암울한 조국의 민주화는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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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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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문통 만큼 깨끗한 대통령 대한민국 역사를 통트러봐도 없지 인정할건한다
아들들이 많이해처드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