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선 나무의 잎들이 며칠 전 바람에 다 떨어져 내리더니 오늘 아침 자세히 보니 가지에 새 순이 돋고 있다. 산자락도 더러 푸르러지고 봄이 가까움이 느껴진다.
2월은 이렇게 시작되고, 쇼핑몰에 가면 온통 하트로 장식된 가게들이 벌써부터 밸런타인스 데이를 기다리고 있다. 초컬릿과 장미가 연인들 사이에 오가며 젊은이들은 또 얼마나 사랑이란 것에 가슴 부풀 것인가. 밸런타인스 데이면 제 약혼녀와 나에게 똑같이 빨간 장미를 한 아름 선물하던 아들이 새 직장을 찾아 타주로 떠나고, 올해는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반려자에게서 장미 한 송이라도 받게 될까.
내게 장미가 없더라도 다른 이들의 꽃다발을 바라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긴 하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마음을 표현하고 선물을 나누는 광경만 봐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건 비로소 ‘사랑’이란 걸 관조할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의 25년을 글쟁이로 살면서 ‘사랑’에 관한 칼럼을 세 번쯤은 썼던 것 같다. 돌아보면 그때, 그때 표현은 달랐지만 사랑에 관한 개념은 늘 한 가지였다.
‘사랑은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사랑은 자신을 갱신하고 자신을 증대시키는 과정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이 문장은 20년도 넘게 전 내가 이 신문 지면에서 벌써 인용했던 것이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도 나는 지금도 그 사랑의 개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를 되새겨본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은 자신과 상대를 성장시키는 일인데도 보통은 ‘사랑’하면 도파민이 분출되는 에로스(Eros)적인 것만 생각하게 된다.
때로 나는 에로스란 인류의 종족번식을 위한 신의 덫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가슴 뛰는 끌림이 없다면, 여인들은 아이를 갖고 출산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감당하려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와 공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들만이 종족번식을 위한 것 외에도 에로스를 즐기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지만 사랑에는 에로스만 있는 게 아니다. 친구들끼리의 우정인 필리아(Philia)도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의 사랑인 아가페(Agape)도 있다. 상대를 소유하고 즐기려는 에로스에 비하면 서로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을 쌍방이 갖는다는 필리아나 그리스도의 희생과 같은 아가페는 차원 높은 사랑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 감성을 자극하는 ‘사랑’만이 드라마나 소설에 깔려있는 건 왜일까. 그것은 정말 초컬릿처럼 달콤하고 쌉쌀한 매력, 장미꽃의 화려한 유혹과 같다. 그 달콤함과 화려함의 뒷면에는 늘 그림자가 있고, 사랑이 그 그림자에 이르면 질투와 눈물, 복수 등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황을 실제 이야기에서, 혹은 영화나 소설에서 봐왔던가.
때로 나는 정말 ‘사랑’이란 건 우리들 속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다. 인류는 신이 부여한 사랑의 개념에 아직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개체일 뿐이라면 너무 부정적인 생각일까. 사실 사랑이 변하고 유한한 것은 본래 결핍된 존재인 인간끼리의 사랑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감히 말해본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길에 이르는 과정이란 것을. 어찌 보면 사람들은 사랑의 그 절대 개념에 이르기 위해 자꾸만 미흡한 사랑을 계속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성서의 ‘아가서’를 연구한 어떤 이는 이런 말도 했다.
‘인간이 사랑에 매이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이 주는 기쁨 때문이 아니라 슬픔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기쁘고 설레지만 동시에 고독과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
고독과 슬픔의 이면엔 그렇게 아름다운 설렘이 있다는, 그 사랑의 양면성에 그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인가. 인류는 사랑을 계속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인 모양이다.
창가 새순 돋은 나뭇가지에 꽃이 필 때쯤이면 붉은 장미다발을 든 여인이 거리를 스쳐갈 것만 같다. 빛처럼 환한 미소에 아름다운 고독이 어린 채.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울지라도 그래도 사랑은 세상에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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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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