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xon은 California 주의 Whittier 시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던 Quaker 교도인 부모밑 에서 열심히 가게일을 도우며 Whittier College 를 마치고 Duke University 의 Law School 을 졸업한후 Whittier 에서 변호사로 일하였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후 Nixon 은 Washington 에서 Office of Price Administration에서 잠시 일하다가 해군중령으로 법무관으로 복무했다.
2차대전 종전후 고향에 돌아온 Nixon 은 선거자금도 별로없이 1946년 중간선거에서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 되었고1948년에 재선 되었었다. 미국사람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한참 고조되어 있던 당시에 강경한 반공주의자 이었던 Nixon 은 하원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의 위원장으로써 젊은 Robert F. Kennedy 변호사를 위원회 조사관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각계 각층에 침투해 있다는 “공산분자” 의 색출에 혼신을 하였었다.
그의 지나칠 정도의 엄중한 검사같은 조사활동 으로 그는 명성을 얻었으나 많은 적대감정을 갖인 개인적인 적들이 생겼었다고 한다. “반공투사”로써 얻은 명성은 그의 1950년도 상원의원 선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며 그와 경쟁했던 여성후보자를 선거유세에서 “친공주의자”로 몰아 부치는등 지나치게 거치른 선거운동을 해서 당선 되었는데 부인 Patricia Nixon 은 이때 정치란 것이 자신의 성품에는 잘 맞지 않는 것이로구나 하고 느꼈었다고 한다.
Nixon 은 본업이 변호사 이기는 하였지만 어쨌던간에 해군중령에서 6년여만에 약관 40세에 부통령으로 “초고속진급”을 하였었다. 우리식으로 표현해서 일찌기 관운이 텃었던 사람이 었었다.
8년간의 부통령직 재임후에 1960년에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 하였었으나 John F. Kennedy 에게 아주 근소한 득표차로 낙선 하였었다. 그는 1962년에 California 주지사에 출마 하였다가 현재의 California 주지사 Jerry Brown 의 부친 “Pat” Brown 주지사에게 낙선 되었었다.
주지사선거 낙선에 대한 낙심과 선거운동중 언론들이 자신을 불공평하게 보도 했다는 불만이 겹쳐서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You don’t have Dick Nixon to kick around anymore!” 라는 유명한 불평을 쏟아내면서 정계를 완전히 은퇴할것 같은 인상을 주었었다.
정치를 “졸업”한 Nixon 은 저명한 법률법인에 partner 가 되어서 New York 시로 옮겨왔다. 그러나 Nixon 은 생리적으로 정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빈번한 외국여행 과 공화당 후보들의 찬조연설을 해주고 다님으로써 국민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때가 다시 찾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Nixon 은 1968년에 다시 출마하여 근소한 표차의 아슬아슬한 경쟁이 었지만 대통령에 당선 되었었다.
대통령 당선이 확인된날 밤에 Nixon 은 자신의 임기동안에 분열이 되어있는 미국민들을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는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분열로 격양이 되어있는 국민들의 감정이 가라앉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Nixon 의 “본성”은 “투사”로 타고난 사람으로써 “화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원의원, 상원의원, 부통령을 해온 정치과정에서 계속 공산주의자들과 그가 국민들의 “적” (enemy) 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을 공격해온 사람이었다.
그는 험난한 정치투쟁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 으로써 혼돈되고 분열되어 있던 당시의 미국을 화합 시킬수 있는 자질이 있는 인물은 못 되었던 듯하다. 요즈음의 Trump 대통령이 Nixon 을 많이 닮지 않았나 싶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Nixon 은 그의 백악관은 미국역사상 가장 개방적인 백악관이 되도록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가장 유능한 인재만을 골라서 각료로 임명 할것이며 그들은 자신이 정책을 수립하는것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였다. 대통령 보좌관들의 역할은 정보를 수집하는것으로 국한될 것이며 정책수립의 결정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느새에 대통령 보좌관들은 권력의 핵심에들 앉아 있었다. Eisenhower 대통령때 군대식으로 정비 되었던대로 보좌관들의 위계, 명령질서도 분명하게 재 편성되었다.
비서실장 (Chief of Staff) 에는 광고업무 전문가 이었다가 Nixon 선거운동의 중요 참모로 일했었던 H.R. Haldeman 이, 외교관계 보좌관으로는 Harvard 대학교의 Henry A. Kissinger 교수가, 국내관계 보좌관으로는 Seattle 의 변호사로써 선거참모 이었던 John D. Ehrlichman 이 임명 되었었다. Lincoln 대통령은 비서 한명의 월급을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주었다고 했을정도로 백악관 직원이 희귀했을때도 있었으나 근래의 대통령들은 백악관 직원수를 늘여 오다가 JFK 때에 보좌관 23명을 포함해서 총 1,664명으로 급증 하였고 LBJ 때도 계속 증가 하다가 Nixon 때인 1971년에는 보좌관 48명을 포함하여 총 5,395 명으로 증대 하였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백악관이 되었다. 그러나 Nixon 치하에서 모든 권력들은 소수의 몇사람들에게 집중되어갔고 대통령은 공무원들과 국민으로부터 격리되고 멀어져 갔었다고 한다.
Eisenhower 대통령때에 쏘련이 제2차 세계대전후에 독일에서 데려온 Rocket Engineer 들을 활용하여 1957년10월 4일에 Sputnik 1호 (184 파운드) 인공위성을 우주궤도에 보내고 다음달에는 1,120 파운드 짜리의 인공위성을 미국에 앞장서서 올려 보낸후 지구를 몇바퀴 돌게하자 미국사람들이 기겁을 하였었다.
그러나 막상 Eisenhower 대통령은 서둘르지 않고 미국의 첫 인공위성을 1958년 1월 31일에 30파운드 짜리를 발사하였는데 실은 미국의 rocket 이 더개발된 것이었고 기술적으로 소형화 되었던 겄이라고 한다 그러나 1961년에 Kennedy 가 대통령이 되면서 문제는 달라졌다. JFK 는 미국의 “후진”이 곧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서 LBJ에게 외계개발 program 을 전담시키고 미국이 “선진”이 되도록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Program 을 위한 지출도 급증하였다.
그러나 JFK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미처 3개월이 않되는 1961년 4월 12일에 쏘련은 우주인을 실은 인공위성을 우주궤도에 미국보다 4주를 앞질러서 올려보냈다. 이제 당황하고 화급해진 JFK 는 긴급회의들을 계속한 끝에 그해 5월에 미국은 Apollo program 을 기발하여 1970년까지 인간을 달에 상륙시켰다가 돌아 오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Apollo program 은 1963년부터 1년에 50억불까지 쓰면서 본격적으 시작되었다. 그와중에서 1967년에는 실험발사 준비를 하던중에 우주선 조종실에 불이나서 최우수 우주인 세명이 사망한 참사도 있었었다.
드디어 1만3천명의 직원들이 Texas 주의 Houston 에서 각고를 한끝에, 또 달까지 무인실험 왕복을 두번한끝에, 1969년 7월 16일에 지구로부터 20만 마일이나 떨어진 달에 3일간의 우주여행 끝에 세명의 우주인들이 탄 Apollo 11호를 올려 보내서 Michael Collins 가 Apollo 11호를 조종하고 있는 가운데 Neill Armstrong 과 Buzz Aldrin, Jr. 두사람은 7월 20일 에 달에 직접 내려가서 인간의 발자취와 함께 발사대를 달에 남겨놓고 돌아왔다.
발사대 위에는 “Here men from the planet Earth first set foot upon the Moon, July, 1969 A.D. We came in peace for all mankind.” 라고 우주인들의 국적을 적지않은채 겸손하고 짤막한 문구를 쓴 기념패를 남겨놓고 무사히 돌아왔었다.
미국은 그후에도 1972년까지 다섯번 더 달상륙을 하였었다. 미쏘간의 우주경쟁이 끝나가던 1972년까지 두나라는 1,200 여대의 우주선을 발사하는데에 1천억여불을 쏟아 넣었었다. “무분별한” 우주정복경쟁은 1970년대 중반에 끝나고 그후에는 더 실질적인 개발에 치중하여서 미국은 1981년에 우주왕복선 Space Shuttle 을 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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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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