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용의 민주화운동 비망록4
▶ 김대중과 한민통 발기인대회
한민통 발기인대회 소식을 보도한 한민신보(위).
정기용 자유광장 대표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그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한 6.3사태를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 새겨진 길고 긴 저항의 산맥을 종주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갈구한 시대에서 그는 화려한 주역은 아니었지만 번민하는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충실한 투사였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온전한 개인사라기보다 주관적인 대한민국의 현대사이며 미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덧붙여 그가 산수(傘壽)의 세월 동안 주유(周遊)해온 애주와 명사들과의 교유의 흥미로운 기록이다.
-유신과 해외민주화 운동
모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흉흉했다. 그 결정판은 1972년 10월17일의 유신 체제 선포였다. ‘한국적 민주주의’란 미명 하에 박정희는 종신집권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정국은 급랭했다. 강제구금과 고문, 날마다 피가 튀었다. 박정희의 독기와 서슬에 모두 숨을 죽였다.
한국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해보았다. “이보게, 여긴 질식 상태야. 이럴 때는 해외만방에 한국 유신체제의 허구를 고발하고 민주 회복에 더 힘써줘야 해.”
1930년대 일제의 광기에 국내 독립운동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지사들은 중국과 연해주, 미국에서 싸웠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해외 투쟁의 비중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그 무렵 김대중은 워싱턴에 체류 중이었다. 1971년 5월에 열린 8대 총선을 지원하다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그는 72년 10월11일 치료차 도일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에 유신정변이 일어나자 귀국을 포기했다. 망명객 신세가 된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다 도미했다.
반(反) 박정희 무드가 강했던 워싱턴은 이제 민주주의를 위한 ‘해외본부’가 됐다. 그는 DC 코네티컷 애비뉴 인근의 쉐라톤 인에 체류하다 얼마 뒤 바네스(Vanaess)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처남인 이성호 씨가 가까이에서 도왔지만 비서실장 역할은 이근팔(李根八) 씨가 맡았다. 평북 맹산 출신인 그는 외교관으로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하다 1970년 눌러 앉았다. 이성호 씨가 운영하던 유라시아 여행사에 적을 둔 그는 영어 실력도 좋았고 착실한 인격자였다. DJ와 동갑이라주위에서 말을 놓으라고 해도 “그래선 안 된다”며 끝까지 깍듯하게 모셨다.
-김대중의 유권자 관리법
나도 한동안 DJ를 수행한 적이 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정보력은 놀라웠다. 박정희 정권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일까지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가령 당시 유혁인 정무비서관과 임방현 대통령 사회담당 특별보좌관이 청와대 화장실을 다녀오다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알려줄 정도였다. 그가 수집한 다양한 국내 정보는 종종 내게 건네줘 한민신보에 실렸다. 김대중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술은 와인 한잔 정도가 다였다. 술을 못 마시는 흔치 않은 정치인이다. 담배도 피지 않았으며 사생활도 깨끗했다. 식사 때면 물에다 밥을 말아먹기를 좋아했다. 배고픈 시절 몸에 배인 습관이었을까.
한번은 종아리를 걷어 올리는데 다리에 털이 하나도 없었다. 대다수 남자들과 달리 백짓장처럼 하얗다. 지금도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다. 상의 안주머니에는 늘 수첩이 들어 있었다.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넣었다. 평소 생각나는 것도 적곤 했다.
워싱턴에서도 한국의 지역구와 지인들을 관리했다. 학생들을 동원해 엽서 100-200여장을 썼다. 그리곤 선거구인 전남 목포의 유권자들에 자기 이름으로 엽서를 보냈다. 외국에서 저명 정치인의 엽서를 받은 사람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DJ는 유권자들의 심리조차 꿰뚫은 천부적 정치인이었다. 그걸 본 내가 농담을 건넸다. “머나먼 미국에 와서도 정치활동을 25시간 하십니다.”
-목포 총선과 DJ의 마타도어
하지만 그도 때론 도덕과 윤리를 초월해야 하는 난세의 정치인이었다. 한번은 내게 1967년 6월에 열린 제6대 총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목포에 출진한 그는 박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박정희는 DJ를 떨어트리기 위해 엄청난 화력을 쏟아 부었다. 총무처장관 출신의 중량급 김병삼을 공화당 후보로 공천한데서 그치지 않았다. 박정희는 직접 목포에서 유세를 했다. 국무위원들을 데리고 목포까지 내려와 국무회의도 주재했다. 관권선거가 판을 쳤다.
“대통령까지 달려들어 선거를 지원하는데 쉽지 않았어. 그래서 방법을 좀 썼어요. 젊은 애들을 공화당원으로 가장해 비누 표와 수건을 나눠주게 했지. 그리곤 다시 찾아가 잘못 나눠준 것이라며 돌려받게 한 거야. 또 젊은 애들이 노인네들에게 담뱃불을 좀 빌려달라고 하면서 공화당원을 사칭케 했어.”
공화당에 대한 여론을 나쁘게 만들기 위한 마타도어였다. 내가 정색을 하고 DJ에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다른데 가서는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DC 메이플라워 호텔서 행사
김대중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시애틀 등지를 돌며 강연 정치에 나섰다. 미 대학에서도 강연했고 한인 학자들을 모아 좌담회를 가졌다. 정치 조직화를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점차 미 전국의 한인 지식인, 학자, 종교인들은 김대중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워싱턴에 민주주의를 위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높아졌다. 그 정치적 움직임의 결과물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이었다.
1973년 7월6일 DC의 메이플라워 호텔 ‘뉴욕 룸’에서 한민통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50여명이 참석했다. 뉴욕에서 임창영, 이보배 전 유엔 대사 부부, 성악가 김천애, 이승만 목사, 강석원 교수, 최석남 장군, 전두환의 육사 동기인 장석윤, 해외 한민보 발행인 서정균, 한민신보 지사장인 윤석진, 한기석, 정일웅, 시인인 고원 등이 왔다.
LA에서는 김상돈 전 서울시장, 송영창, 정의순, 아시안대회 역도 동메달리스트인 고종구, 한민신보 지사장인 이기룡, 신한민보 발행인 김운하 등이, 디트로이트에선 김지하의 막내 외삼촌 정일성과 송숭락 교수, 심장전문의 김용성, 시카고에서는 최명상, 조병웅 등이 참석했다.
캐나다에서도 상당수가 합류했다. 토론토의 한민신보 지사장인 김원동, 박찬웅 교수와 박찬도 형제, 전충림 등이 그들이었다.
-최석남 장군의 망명정부 제안
학계는 물론 행사 개최지인 워싱턴 지역에서도 많은 인사들이 참가했다. 전규홍 전 서독대사,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친분이 두터웠던 버지니아비치의 주우정 엘리자베스대 교수, 김동수 교수, 오민언, 조웅규 교수, 장성남, 유기홍 박사, 임동규, 강영채, 신대식 목사, 포항공대 총장을 지낸 김호길 박사, 유학생 회장인 마동성, 김응창 워싱턴한인회장, 김석남, 최창훈 등이 기억난다. 또 고재곤, 고세곤, 고의곤 삼형제도 있었다.
특히 주미 공보관장을 지낸 이재현 박사가 참석, 망명선언을 해 갈채를 받았다. 김보성 전 주미공보관장도 참석해 이목을 끌었다. 김대중은 이날 군부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열정적 연설을 했다.
행사 도중에 해프닝도 일어났다. 최석남 장군이 불쑥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망명 정부를 세워야 한다.” 장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발언은 여러 사람의 제지를 받았다.
사안의 예민함을 직감한 DJ도 나섰다. “지금은 일제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박 정권을 인정 않는 게 아니다. 민주정부로 교체하자는 거다. 그런 제안은 맞지 않다.”
최석남은 박정희와 육사 동기로 육군 통신감을 지낸 예비역 장군이었다. 또 탁월한 충무공 연구가이기도 했다.
-7인의 창립위원과 2대 원칙
안병국 목사가 사회를 본 이날 행사에서는 김대중을 창립준비위원장, 그리고 안병국, 김응창, 동원모, 전규홍, 임병규, 최명상 등 7인을 준비위원으로 선출했다. 한민통의 방향인 2대 원칙도 채택됐다.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하고 선 민주회복 후 통일추진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용공혐의를 씌우려는 박 정권에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DJ는 가는 곳마다 그의 진정성을 알리려 했다. “우린 반(反) 국가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정부 비판은 자유이지만 나라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 우리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성격은 반(反) 국가가 아니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을 비판한 것이지 대한민국을 비난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민주화 세력들에게 용공과 반국가 혐의를 덧씌우려했다. “정권욕에 눈이 먼 일부 불순분자들이 국가를 모독하고….” 어용 언론들은 박의 발언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억울하게도 반국가 행위자들로 몰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정부를 구분하지 못한다. 왕조체제와 전제정치 하에서는 정부=국가란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현대의 정부는 국민에 의해 한시적으로 부여된 권력일 뿐이다.
-DJ 일본 출국 환송모임
김대중은 다시 일본행을 결심했다. 한국 군부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일본내 여론도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한민통 일본 본부 결성도 준비되고 있었다. 1973년 7월, 출국 전날 그의 DC 바네스 아파트에서 환송 모임이 열렸다. 그는 내게 비싼 고량주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곤 혼자만 방으로 불러 주위를 살펴보더니 봉투를 하나 건넸다. “내가 지금 자금이 떨어졌는데… 일본 다녀오면 좀 넉넉해질 거요.”
8일 동경에 도착한 그는 다음달 8일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다. 박정희에게 그는 죽어야만 직성이 풀릴 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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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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