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워싱턴에 문인회가 처음 탄생한 해가 1990년. 토론토에서 목회를 하다가 메릴랜드교회로 오신 반병섭 목사님이 전화로 인사하며 내게 문학회를 만들자고 재촉하셨다. 문학은 자기 골방에서 혼자 글 쓰는 일이라고 처음에 반응하지 않다가 한 달이 넘고, 더 이상 내 뜻을 전하기 어려워 그렇게 하자고 마침내 동의해버렸다. 목사님이 문인회원이 될 만한 분들을 소개, 추천하라고 해서 몇 분을 추천하겠다고 말씀했다. 반목사님은 토론토 문학회가 참 좋았다고, 그래서 워싱턴에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문예반에 몸담아왔고 학교신문, 교지를 만드는 일을 해온 나에게 이 도시에 어른들의 문학인 단체가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불확실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인회가 올해로 삼십년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 분과 내가 모은 문학인이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예닐곱.
나는 신학교 강의시간에 만난 내 연대 1년 선배 허권 목사와 워싱턴 포스트 안재훈 기자를 추천했다. 그렇게 워싱턴문인회가 발족되었고 나는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연간으로 워싱턴문학을 간행하고 신인들의 등용문인 신인상을 제정하고 매월 반 목사님 교회에서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모임을 열었다. 한국일보에 문인회가 발족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전화를 주신 분은 볼티모어 항구라는 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던 김행자씨였다. 그분은 숙명여대신입생 때 중앙일보신춘문예 동시로 당선된 재원이었다.
그 때 딕테 dictee 라는 작품을 남기고 타계한 차학경 theresa hakkyung cha 의 어머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를 찾아와 학경이가 남긴 영어시편을 번역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시와 산문의 장르를 넘는 이해하기 어려운 학경의 문장을 번역해 문학사상에 발표했을 때 그 어머니는 내게 참 고마워했다. 아무도 비명에 죽은 딸이 남긴 글을 해독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신인상의 영문분야상을 차학경 문학상이라 이름 하여 그 어머니가 삼백달러를 보내주셨다. 그 기부금으로 첫 신인상당선자를 배출했다. 그리고 워싱턴문학 창간호를 간행했다. 그 안에 영문시도 몇 편들어갔다.
워싱턴문인회 초대 회장으로써 내가 한 일이었다. 회원들의 작품을 많이 고쳐서 발표했을 때 불만이 나오고 나는 그쯤에서 초대회장의 도리를 끝냈다. 반 목사님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는 뒤 안으로 사라졌다. 초대회장시절 박남수 선생을 초대했고 이해인 수녀와의 만남이 추억 속에 남아있다.
1990년에 내 첫 영문시집 ‘가을 어휘록 autumn vocabularies’ 이 인도 캘커타에서 나왔고, 첫 한글시집 ‘정읍사’ 가 서울 나남에서, 산문집 ‘미국을 다시 본다’ 가 서울 고려원에서 나와 문인회가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영문시집은 1990년에 나왔지만 ‘정읍사’, ‘미국을 다시 본다’ 는 1986년에 한국에서 나온 책이었다. 아마 영문시집 간행을 축하하면서 이미 나온 두 권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모임으로 추측한다. 한국에서 나온 두 권의 책에 대해 기록해야 할 말들이 있다.
내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타계했던 1982년 6월 장례식에 가야할지 망설일 적에 어머니는 “아들이 여기 도착할 때까지 장례식을 미루겠다”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일시귀국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까지 나는 반체제 문필가로 일시귀국이 어려웠을 때였고 미국여권도 아직 만들지 않고 있을 때였다. 나는 급히 급행료를 지불하고 미국여권을 만들었고 일시귀국을 만류하는 미국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어렵게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나는 아버지가 그동안 내가 발표한 시편들을 대학노트에 옮겨 적으신 것을 알게 되었고 “나 죽으면 시인의 아버지”라고 비석에 써달라는 유언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노트북을 두 친구에게 전했다. 나남에서 “지금까지 시집을 내지 않았지만 최교수님 시집을 나남 첫 시집으로 내드리겠다”는 소식을 접했다. 30분 후에 실천문학사에서 간행하겠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먼저 약속한 나남에게 출판을 부탁하고 한국을 떠났다. 발문은 내게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한 중학교시절의 국어선생님, 서강대 김열규 교수님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내 시집 ‘정읍사’가 나왔다. 아들이 시인이기를 희망했던 아버지에게 드리는 시집이 되었다. 표지의 정읍사 제자는 한문고체로 장인어른이신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써주셨다.
가회동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 시신은 병풍 뒤에 놓여있었고 그 옆에 지인사에서 보낸 조화가 놓여있었다. 지인사에서 나온 내 첫 산문집 ‘떠나온 그 자리에’(1981) 가 거기 놓여있었고 워싱턴 포스트에 발표된 내 글이 그 옆에 놓여있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중요하게 간직한 책과 신문기사였다. 1950년대 후반 민숙현은 경기여고 문예 반장이었고 결혼 후 부군 김하중씨와 지인사를 운영하고 있어서 워싱턴 동아일보에 매주 2회 연재했던 “최연홍 칼럼”을 모아 산문집을 내준 작은 출판사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나온 유일한 내 저서가 되었다. 장례식 후 김하중씨에게 인사를 갔더니 그는 마당이라는 월간지 발행인을 맡고 있었다. 마당 편집실에서 나는 후일 유명한 보수논객이 된 조갑제씨를 만났다. 그 두 분은 내게 “한국인들이 미국을 잘 아는 것 같아도 사실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며 내게 “미국을 다시 본다” 라는 연재물을 청했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 마당에 15,6회가 나갔다. 매월 원고지 60매 분량의 글이 모여져 후일 베스트 셀러 출판사로 알려진 고려원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미국을 다시 본다 ’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당시 베스트 셀러로 5판까지 찍은 나의 유일한 인세를 받은 책이 되었다. 어머니가 인세의 도장을 5000개 이상 찍어준 책,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린 책이 되었다.
1990년 여름, 나는 서울에서 열리는 제 12차 세계시인대회 world congress of poets 에 참석해 세계의 시인들과 만났다. 그 대회에 나는 미국의 비트 민중시인으로 알려진 알렌 긴스버그를 데리고 갔다. 그 기념으로 그의 대표시집 ‘howl’ 을 우리말로 번역, 시문학에서 ‘아우성’으로 펴냈다(1990). 그때 이어령씨가 문화부 초대장관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축사를 했을 때 내가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1994년 4월 나는 내 생애 시인으로 가장 큰 영예로운 시낭송의 저녁을 미의회도서관에서 갖게 되었다. 한국 시인으로는 처음 미국 계관시인의 초청으로 시낭송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 도시에 살면서 미의회도서관에 시인의 방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의회도서관 본관 4층에는 시 자문역 poetry consultant 이라는 방이 하나 있었다. 거기서 시카고 출신 흑인최초의 퓰리처상수상 여류시인 그웬도린 부륵스 gwendolyn brooks 를 만났고 메릴랜드대학 영문학교수이며 메릴랜드 주 계관시인출신 리드 휫트모어 reed whittemore 도 만났다. 그들은 나를 언제나 격려했고 브륵스는 내 첫 영문시집 ‘가을 어휘록 autumn vocabularies’ 서문에 들어간 서시, “최연홍” 이란 시 한편을 써주기도 했다. 의회도서관 자문역 poetry consultant 이라는 명칭은 후일 계관시인 poet laureate 으로 변했다. 그 역할은 똑같았다. 단지 더 명예로운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94년 내가 시낭송을 했던 해는 버지니아대학 문예창작교수 리타 도브 rita dove 가 흑인여류시인으로 계관시인이었다.
1996년 나는 홀로 된 어머니를 위해 서울시립대 객원교수로 미국을 떠나 한국에서 10년을 살게 되었다. 겨울방학과 여름방학 5개월을 다행히 버지니아 집에 와 살면서 두 나라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 나를 만난 시문학사의 김규화 시인은 “최연홍씨, 이제 우리사람이 되었네요!” 반가워했다. 그때까지 내 한국어는 1960년대 고어체였던가. 한국을 떠날 때 언어를 그대로 삼십여 년 유지했기 때문이었으리라.
1997년에 내 두 번째 시집, ‘한국행’이 푸른 숲에서 나왔다. 내 귀향을 축복하는 시집이 되었다. 금성출판사가 미국에 진출하면서 기념으로 펴낸 내 산문집 ‘떠남으로써 머물러 있는 사람’ (1990),한국으로 돌아가면서 기념으로 나온 ‘미국을 다시 본다’ 의 후속 산문집 ‘마돈나에서 클린턴까지’, ‘할렘가에서 백악관까지’, 중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읽힐 ‘우리시대의 영웅들’ (1998), 그리고 범우사에서 기획한 환경정책분야의 산문집 ‘섬이 사라지고 있다’ (1999)가 나의 50대에 해당하는 90년대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의 귀향을 축복한 선물이었다. 내 어머니가 내가 낸 책들을 안고 잠이 들었고 아버지 제사상 위에 이 책들을 올려놓고 감사하셨다.
지난 2010년 펴낸 회고록‘나의 노래’ 출판기념회 사진. 앞줄 오른쪽서 여섯 번째 필자.
2000- 2010
1996년 나는 한국의 어머니 옆으로 가 십년을 서울시립대교수로 살면서 버지니아에서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1996-2006년, 두 나라를 통근하면서 다닌 세월이었다. 2006년 은퇴하면서 다시 버지니아로 돌아왔으니 그 세월 나는 두 나라를 함께 살고 있었다. 은퇴하면서 나는 미국에 가난한 유학생으로 와서 살아온 삶을 영어로 쓰게 되었고 그 회고록은 나의 가장 중요한 책이 되었다. ‘나의 노래: 한 한국계 미국인의 삶 song of myself: a korean-american life. poetic matrxix’, 2010년에 간행한 이 회고록은 이민1세의 삶을 진솔하게 서술한 것이었다.
이민1세의 삶, 내 아들딸도 모르는 삶, 1세대의 삶만큼 치열한 삶이 있을까?
60년대 가난한 나라의 청년이 빈손으로 미국에 공부하러 와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살게 된 이야기, 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나라에서 살게 되었는지 돌이켜 보면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시애틀에 내려서 만난 첫 번째 미국인 부부, 이름도 성도 잊어버린 그 부부에게 보내는 내 감사가 그 회고록 쓰기의 첫 동기가 되었다. 그 후 내가 만난 사람들, 인디아나 대학의 스승, 위스칸신대학에서 첫 교수생활, 결혼, 아들딸의 탄생, 펜타곤, 워싱턴에서 살아온 삶, 한국으로의 귀향, 다시 버지니아 숲속으로 돌아온..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어찌 다 적어놓을 수 있을까.
하늘이 내려준 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온 것을 내가 다듬으며 만든 길이라고 착각하고 살지 않았나?
2003년은 하와이이민 100주년 해였다. 내가 하와이이민100주년 기념행사로 펴낸 책이 한국에서 나온 ‘사진신부’ 와 미국에서 나온 ‘떠오르는 슬픔 surfacing sadness’ 두 권이다. 이 두 책은 한인이민사에 남을 역사적 저술이 되었다. 100년 동안의 미국 속의 한국문학을 정리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두 권의 역사적인 책은 김행자씨와 공동 편집인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 이유는 김행자씨가 100주년기념 사업회 문학을 담당하는 임원이었고 나는 그녀를 돕는 역할을 담당했으니까. 그리고 2003년 1월 미의회도서관에서 내 두 번째 시낭송이 하와이 이민 100주년 기념행사로 이루어졌다. 이 시낭송회에 김행자씨와 권귀순씨가 동참했다. 귄귀순씨는 박남수 선생의 시를 낭송했다.
은퇴란 시인으로 살아온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동안 발표한 시편들을 먼저 정리해 세상에 내놓은 ‘Moon of newyork’ (2008)은 먼저 인도 칼캇타에서 나온 ‘Autumn vocabularies’를 포함한 미국에서 나온 첫 시집이다. 2년 후 ‘Copenhagen’s bicycle’ 이 나왔고 5년 후 ‘Adieu, winter’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은퇴하기 전 ‘최연홍의 연가’, 은퇴하던 해 ‘아름다운 숨소리’가 시집으로 나왔다. 연가는 연애시의 모음이었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어머니의 숨소리였다. 내 은퇴식을 서울시립대 도시행정대학원 방재공학과와 환경정책전공의 제자들이 남산 “문학의 집”에서 성대하게 준비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반기문 외무장관의 화환이 나와 그들의 인연을 말해주기도 했다. ‘아름다운 숨소리’ 출판기념회도 겸한 은퇴식에는 가까운 시인 민영, 김기택, 이동하, 동료교수이며 문학평론가, 소설가 정소성이 참석 간단한 축사를 해주었다.
서울시립대 10년 동안 나는 한국의 주요일간지, 주간지, 월간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문필가, 학자, 교수, 시인의 삶은 많이 중첩되고 있었다. 내 삶에서 학자, 시인, 문필가, 교수의 삶을 분리할 수 없지 않은가? 내 어머니의 영안실에서도 문화일보의 청탁을 받고 글을 써 보냈다. 내 누이동생이 아직도 어머니가 내 글을 읽고 계시리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코리아 타임즈의 내 칼럼을 오래 간직해두셨다. 일주일에 한번 내 칼럼이 나가고 있었는데, 어머니는 내 칼럼의 제목을 기억하고 계셨으니, 어머니는 아들의 삶속에서 문필가의 삶을 가장 고마워하시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아직 서울로 통근하고 다닐 무렵 워싱턴지역의 시 쓰는 친구들이 시향, 시의 향기 라는 동인, 후일 미주한국시문학회로 이름을 바꾼 단체를 만들고 나를 초대회장으로 추대해 받아들였다. 그 단체는 연간으로 ‘시향’을 발행하며 영문시집도 내기로 했다. 첫 영문동인지가 ‘Fragrance of poetry’ (2005), 시향을 그대로 영어로 옮긴 동인지를 펴냈다. 그 다음에 나온 동인지가 ‘An empty house’ (2008) 빈집’ 이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시인들이 한글로만 쓴다면 반쯤 성공한 시인이고, 영어로 함께 쓴다면 온전히 성공한 시인이라는 내 생각은 90년대나 그 후,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한국에서 온 원로시인으로 내가 지향하는 목표를 동인들에게 그만큼 설득했지만 영어는 지금도 닿지 못하는 장벽으로 보인다. 언어의 장애를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문필가의 삶속에 어두운 삽화하나를 공개하야 할 것 같다. 2000년 2월 6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Losangeles times 일요판에 나간 내 글이 서울시립대에 충격을 준 “필화” 사건이었다. Seoul cannot go on halfway democracy. 이 글은 1999년 11월 9일 광화문 세종회관에서 있었던 방재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후 쓴 글, 겨울방학에 버지니아 집에 와서 쓴 글이었다. 그 행사에 초청받은 학자로 참관했는데 대통령부부가 입장하기 한 시간 전에 참석, 대통령부부가 떠난 삼십분 후에야 우리들의 퇴장이 가능한 모습을 보고 평생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대통령이 아직도 지나친 권위주의에 사로잡혀있는 한국을 비평한 글이었다.
2월 중순 서울시립대로 돌아갔더니 학교분위기가 냉랭했다. 청와대 외신담당비서가 총장실에 와서 나를 근신하게 하라고,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런 신문기사가 국익에 해가 된다”고 질책했다고 들었다. 미국에서 가장 부수가 많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가 어떻게 이런 글을 실을 수 있느냐고 했단다. 며칠 후 총장호출이 있어서 갔더니, “앞으로 5년 외국신문에 글을 쓰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우간다인줄 아십니까?” 소리치며 나왔다. 서울시 부시장 출신의 총장이란 자, 그의 머리와 양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와 다른 미국의 일간지에 글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밝혀야 할 것 같다.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들은 washington post writers group 이란 조직을 만들어 그들이 쓴 글을 미국과 세계의 매체에 내보내고 있다. 한국도 이제 한국의 사건들을 한국인들이 써서 세계에 팔자는 내 뜻을 코리아 타임즈에 알리면서 korea times writers group을 만들었는데 결국 내 글만 미국 매체에 나가게 된 것이었다. 지금도 korea times writers group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논평을 아직도 한국인이 외국매체에 발표하지 못하고, 팔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외국의 독자가 원하는 글을 한국의 문필가는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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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홍 <시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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