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민신보의 창간과 김지하의 ‘오적’ 시
▶ 정기용의 민주화운동 비망록2
상항에서 오래 친분을 쌓아온 이민휘 선배(가운데, 전 미주총연 회장)가 운영하던 화랑체육관 앞에서. 이 선배 오른쪽이 필자, 그 다음은 강우정(현 한국성서대학교 총장).
정기용 자유광장 대표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그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한 6.3사태를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 새겨진 길고 긴 저항의 산맥을 종주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갈구한 시대에서 그는 화려한 주역은 아니었지만 번민하는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충실한 투사였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온전한 개인사라기보다 주관적인 대한민국의 현대사이며 미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덧붙여 그가 산수(傘壽)의 세월 동안 주유(周遊)해온 애주와 명사들과의 교유의 흥미로운 기록이다.
-김태정이 건네준 태극기
나의 미국행이 알려지자 여러 지우(知友)들이 송별회를 베풀어주었다. 김동영은 나보다 두해 앞서 정치학회장을 지낸 선배다. 명동에서 김재만 선배와 그가 술을 한잔 샀다. “미국에 가거든 부디 성공해라.” 그 우의가 고마웠다.
‘좌 동영, 우 형우.’ 김영삼의 왼팔로 불리던 그는 YS가 집권하자 정무장관을 지냈다. 미국에 와서도 오래 교분을 나눴지만 일찍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봄이 온 산하에는 개나리가 지천이었다. 6.3 사태로 나는 사랑하는 조국에서 쫓겨났다. 자의반 타의반의 학생 출국 1호였다. 몇 개월 뒤에 서울대 김중태가 2호로 도미했다.
4월5일 김포공항, 여러 벗들이 환송을 나왔다. 서울 법대 다니던 김유성과 김태정, 외무차관을 지낸 김항경도 있었다. 태정이는 태극기를 내 손에 지어주었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역임했다.
KAL에 탄 나는 동경 하네다 공항에서 영국항공 BOAC로 갈아탔다.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내렸다. 미지의 신천지였다.
-상항의 광복절 사건
아무 준비 없이 온 미국이었다. 우선 랭귀지 스쿨에서 3개월 영어를 공부한 후 링컨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샌프란시스코에는 500-700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절반 이상이 하와이 이민자와 그 후손이다. 한인회장은 이발사인 김동우 씨였다. 그는 이승만 박사와 독립운동을 함께 한 지사였다. 총영사는 주영한 옹이다. 그도 구미위원부 등에서 이 박사와 활동한 분이다. 그는 초대 총영사를 그만 둔 후 ‘공개편지’란 비정치적 소식지를 만들어 한인들에게 보냈다. 해방 전에 독립운동을 위해 만든 월간지를 다시 낸 것이다. “~그랬다더라.” “~하였더라.” 같은 옛 문체가 기억에 남는다.
흥사단 창단 회원이기도 한 양주은 옹은 독립운동과 한인 정착을 많이 도운 인물이다. “내가 전에 찬관을 했어.” 그는 처음 들어보는 용어를 썼다. 음식점을 겸한 숙박업소를 운영했다는 뜻이었다.
양 옹은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 저격 당시의 상황이나 이승만 박사의 일화 등을 자주 들려주었다. “이 박사가 우리 집에 자주 왔어. 오랫동안 자고 먹고 해도 갈 때는 한 푼도 안 내고 갔어.”
도미한 지도 1년이 지났다. 광복절 행사가 어느 강당에서 개최된다 하여 가보았다. 100명 넘은 한인들이 정장 차림으로 참석했다. 먼저 리셉션이 열렸는데 필리핀 밴드들이 연주하는 첫 곡이 일본 노래였다.
“광복절 행사에 일본 노래라니!” 분개한 나는 물 양동이를 무대 위로 집어던졌다. 난장판이 됐다. 행사는 애국가를 부른 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다. 그 일로 나는 항일정신이 투철한 스타가 됐다.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강제출국 2호인 김중태와 만났다.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그는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연)’를 결성하고 6.3사태를 주도했다(왼쪽). 1970년 11월 창간한 한민신보 1호. 김지하의 ‘오적’이 실렸다.
-윤보선 전 대통령이 건네준 책자
60년대 말, 워싱턴을 자주 들락거렸다. 세계 정치무대의 중심지인 워싱턴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지만 국내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동지들에 도움이 될까해서다.
한번은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과 공덕귀 여사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내 친구인 윤혜구의 소개로 인사를 드렸다. 윤혜구는 해위(海葦)의 5촌 조카다. 윤 전 대통령은 내게 얇은 책자 2권을 건네주었다. “자네 이걸 읽어보고 잘 처리해 보게.”
한 책자는 김지하의 ‘오적(五賊)’ 원본이었다. 당대 권력층의 실상을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비유하며 박정희 정권을 통렬히 풍자한 장시다. 70년 5월 이 시를 게재한 사상계는 폐간됐다. 시인은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보내졌다. 한국 지성계를 동지(動地)케 한 그 금시(禁詩)가 태평양을 건너 내 손에 쥐어진 것이다.
다른 책자는 서울대 의대생들이 쓴 성남 판자촌 환경 실태에 관한 종합 보고서였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참담한 내용이었다.
윤 전 대통령이 숨겨온 그 ‘오적’이 나를 신문으로 이끌었다. 암담한 조국을 위해 나는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의 뇌관을 찾아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1970년 11월 ‘한민신보(韓民新報)’를 창간했다.
-한민신보 창간
제호(題號)는 워싱턴유학생 회장이던 김태홍의 작품이었다. 메릴랜드대 석사과정에 있던 그와 신문 창간을 의논하다 그 친구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제자(題字)는 아내 이문자가 붓으로 썼다.
난 신문 제작과 운영 경험이 전무했다. 마침 상항에 강우정이 있었다. 4.19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한 친구다. 제주 출신으로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기사 작성법부터 신문 제작까지 강우정의 큰 도움을 받았다.
마침내 1호를 냈다. 4페이지의 타블로이드판이었다. 김지하의 ‘오적’ 시를 실었다. 한국에서 비밀문서처럼 돌아다니던 ‘오적’이 실리자 사방에서 보내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1호는 1천부를 발행했다. 상항에 200-300부 가량, 그리고 워싱턴과 뉴욕, LA 등 미 전국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구독료는 5불을 받아 나중에 7불로 올렸다. 2호부터는 8페이지로 늘렸다.
신문사 경영을 위해 상항의 유지 7명으로 이사회를 만들었다. 첫 모임을 열었는데 2명밖에 나오지 않아 이사회가 무산됐다. 기관의 압력이 미쳤던 것이다. 그래도 음양으로 지원을 해주어 그럭저럭 운영할 수 있었다.
-‘반공법 재고’ 사설과 공관의 압력
그런데 2호가 말썽을 일으켰다. ‘반공법 재고를 바란다’는 사설이 문제가 됐다. 반공법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사형감이던 시절이다. 공사 출신이던 소상영 총영사가 만나자고 득달같이 연락이 왔다. 공관에 가니 김 모 중앙정보부 직원도 있었다.
“당신, 서울의 아버지 사업도 있는데 이러면 되느냐. 공부만 하지.” 반 공갈이었다. 은근히 회유도 했다.
굴복하면 안 되었다. 어차피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는 길 위에서 핀 장엄한 꽃이다.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정기용 대표는…
1940년 서울생. 동국대 정치학과 재학 중 6.3시위 주도. 65년 도미해 링컨대학교서 수학. 70년 반독재 민주화 신문인 한민신보 창간해 16년간 운영.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창립 멤버로 홍보위원장 역임. 80년 광주항쟁 시 백악관 앞서 89일간 단독시위. 88년 윤길중 민정당 대표 보좌역(비서실장), 1990년 한국서민연합회 조직해 2006년까지 회장 역임. 95년 서울시장 출마, 현 자유광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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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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