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오페라 카르멘을 작곡한 조르주 비제 작품 중에 ‘아를르의 여인’ 조곡(모음곡)이 두개 있다. 그 조곡 2번 중 플룻이 연주하는 미뉴에트(3악장)는 내 ‘휘파람 18번’이기도 하다. 프랑스 남부도시 아를르에서 온 끼 있는 처녀를 사랑한 청년이 그녀의 부정한 과거를 알고 갈등 끝에 자살하고 만다는 줄거리의 이 조곡은 알퐁스 도테의 동명소설이 원전이다.
로마시대에도 있었던 고도 아를르는 끼 있는 여자와 전혀 다른 면에서 유명하다.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그곳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아를르의 여인’이라는 타이틀도 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잔 칼맹(카르멘이 아니다) 할머니와는 딴판이다. 그녀는 거기서 태어나 122년 164일을 살았고, 인류사상 최장수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진품 아를르의 여인’이다.
칼맹의 그 자랑스러운 기록이 도전받고 있다. 지난주 러시아 수학자 니콜라이 자크가 “칼멩은 실제로 99세에 죽었고, 그녀의 유산을 상속받은 딸이 세금을 피하려고 어머니 행세를 하며 살았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요즘 흔한 ID 도용이라는 얘기다. 전 세계 언론이 이를 다투어 보도했다. “잔 칼맹이 사기꾼이었나?”라는 제목을 단 신문기사도 있었다.
칼맹은 공식 기록상 1875년 2월21일 아를르에서 태어나 1997년 8월4일 아를르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가족들도 비교적 장수했다. 오빠는 97세, 아버지는 93세, 어머니는 86세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미 112세였던 1888년 1월 세계 최고령자로 등극했고, 모세가 향수한 120세 때인 1995년 10월엔 (문서로 인증된) 인류사상 최고령자로 승급됐다.
얼핏 생각하면 칼맹이 덩치 크고 먹성 좋은 농사꾼 여장부일 것 같지만, 정반대다. 체구가 자그만 했던 그녀는 조선업자 아버지 덕분에 손가락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랐다. 21세 때 유대인 조상들처럼 근친결혼을 했다. ‘겹사촌 결혼’이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남편 페르난드 칼맹의 할아버지는 형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할머니들도 친자매였다.
칼맹은 결혼 후에도 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남편 역시 큰 직물가게 주인으로 부자였다. 칼맹은 상류사회 여성답게 수영·펜싱·사이클링·롤러스케이팅으로 시간을 때웠고, 처녀 때 익힌 피아노 솜씨로 친구들과 음악회도 곧잘 열었다. 남편과 함께 알프스 산록으로 장기 산행여행을 떠나거나 프로방스 산에서 토끼사냥도 즐겼다. 한마디로 호화판 인생이었다.
칼맹의 외동딸인 이본 칼맹은 아를르 타운 역사상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을 낳았지만 폐렴으로 36세에 요절했다. 그 후 칼맹은 손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 길렀다. 20년 후 칼맹의 남편 페르난도도 73세에 세상을 떠나자 칼맹은 홀아비인 사위도 데려와 함께 살았다. 당시 인구조사에서 칼맹은 무슨 이유에선지 손자 이름을 자기 아들로 등재했다.
러시아 수학자 자크는 바로 그 점을 꼬집었다. 딸이 죽은 해에 실제로는 칼맹이 죽었고, 딸이 칼맹의 집에서 자기 아들을 길렀으며 나중에 남편도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자크는 칼맹의 눈동자 색깔 기록이 달라졌고, 말년에 키가 채 1인치도 줄지 않은 점(딸은 더 컸다), 당국이 요청한 문서와 사진 등 가족 사료를 폐기했다는 점 등을 ‘사기’의 근거로 들었다.
비슷한 의문점들이 전에도 제시됐었다. 노령학자들은 우선 칼맹의 나이가 다른 고령자들보다 월등하게 많고, 죽기 전에 치매증세가 없었으며 걷는데도 불편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당국과 칼맹을 진료한 의사, 그녀의 전기를 쓴 작가 등은 이들의 주장이 “웃긴다”며 일축한다. 그녀의 최장수자 기록은 호적부와 병원 진료기록이 입증한다는 것이다.
미국인 최고령자였던 오하이오주 의 레시 브라운 할머니가 엊그제 114세로 사망했다. 지구촌에 110세 이상 장수자는 부지기수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아 앞으로 계속 더 늘어난다. 난공불락 같은 칼맹 할머니의 장수기록도 사실이든, 거짓이든, 언젠가는 깨질 터이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보다는 잘 살고(well-being), 잘 죽는 것(well-dying)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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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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