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4월 김포공항에 환송 나온 친구들과. 왼쪽 두 번째가 김태정 전 법무장관, 네 번째가 필자, 오른쪽 두 번째가 김항경 전 외무차관. 정기용씨. 80년대 중반 귀국했을 때 윤보선 전 대통령이 자신이 묻힐 충남 아산의 가묘에 날 데려갔다. 1960년경 논산훈련소 복무 당시 김종인(왼쪽)과 함께. 대통령 경제수석과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을 지낸 김종인은 고교 때부터 친구로 같이 입대해 군 생활을 했다(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정기용 자유광장 대표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그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한 6.3사태를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 새겨진 길고 긴 저항의 산맥을 종주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갈구한 시대에서 그는 화려한 주역은 아니었지만 번민하는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충실한 투사였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온전한 개인사라기보다 주관적인 대한민국의 현대사이며 미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덧붙여 그가 산수(傘壽)의 세월 동안 주유(周遊)해온 애주와 명사들과의 교유의 흥미로운 기록이다.
신은 짓궂게도 우리에게 에리스의 ‘골든 애플(Golden Apple)’을 던졌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의 광풍이 인간과 사회를 질식시켰다.
그러나 이성과 합리에 눈뜬 젊은 세대들은 세계를 지배해오던 반봉건의 유습과 야만의 광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1960년대는 청년들의 함성이 세계를 뒤덮던 시기였다. 4.19 민주혁명과 6.3사태는 그 세계사의 흐름과 한국의 각성한 젊은 지성들이 만난, 민주주의로 가는 변곡점이었다.
-중부서에서 만난 박처원 형사과장
“기용아. 복학해 보니 어때? 세상 많이 변했지.”
동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것이 1958년이었다. 2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해 3년을 복무한 후 제대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는 끝나 있었다. 육군 소장 출신인 박정희가 군사정변으로 장면 민주당 정부를 뒤엎고 새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사회도 그랬지만 대학가의 분위기도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의욕과 활기가 넘쳐났다.
특히 4.19를 경험한 세대들은 권력의 힘에 굴종하려고만 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을 통해 국교정상화를 밀어붙였다. 문제는 그 내용이 굴욕적이라는데 있었다. 해방된 지 채 20년도 되지 않았다. 일제 치하에서의 수모와 치욕의 기억은 아직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했다.
대학가는 뜨거워졌다.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학생들은 소리 낮춰 수근 댔다. “이건 일본 놈들에게 다시 나라를 팔아먹는 꼴이야.”
복학하자마자 나는 동국대 정치학과 학회장에 선임됐다. 복학생 조직인 ‘제대 교우회’ 수석 부회장도 맡았다. 하지만 복학의 달콤함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한일회담 반대 데모 열기가 대학가를 휩쓸었던 것이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발생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돼 갔다. 동국대 학생들도 거리로 나섰다. 나는 그 전위에 있어야 했다. 그 대가로 7번이나 연행돼 경찰서 신세를 졌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경찰은 학생들을 고문하거나 심하게 다루진 않았다.
동국대를 담당하던 기관은 중부경찰서였다. 그 때 형사과장이 훗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총책임자였던 박처원 치안감이었다.
-각 대학 시위 누가 움직였나
서울의 각 대학은 느슨하지만 협조체계를 구축해 움직였다. 서울대는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멤버인 김도현, 김중태, 박범진, 이종율, 현승일 등이 앞장섰다. 홍사덕, 이경재, 박실 등도 있었다. 총학생회장은 정정길이었다. 똑똑하고 정직한 친구였다. 시골 출신인 그는 구속됐다 풀려나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갔다. 서울대 교수로 있다 이명박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또 김영삼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정남, 서울신문 주필이었던 김호준, 내 중동고 1년 후배인 시인 김지하와 그의 외삼촌이자 미학과 1년 선배인 정일성,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을 지낸 권근술, 송철원, 김정강,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이부영 등이 주역이었다. 당시의 인연으로 김도현, 현승일, 김정남과 권근술, 민병석, 이부영은 지금도 막역지우로 만나고 있다.
연세대에서는 안성혁, 오건환, 이염 그리고 고려대에서는 구자신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박정훈 법대 회장, 유준상, 상대 회장이던 이명박, 4.19 당시 총학회장이던 강우정 등이 시위를 조직했다. 대우를 다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정훈은 둘도 없는 친구다.
동국대에서는 나를 비롯해 총학생회장 김실, 장장순 제대교우회장, YS의 오른팔이 된 최형우 선배, 국회의원을 지낸 신순범 등이 주도했다. 김선흥, 신승길, 송영화 등도 활약했다. 중앙대의 유용태, 서청원, 이재오와 성균관대의 김광열, 김삼연, 오성섭, 탁형춘과 건국대의 박원규, 민승 등도 떠오른다.
여학생들도 시위대열에 빠지지 않았다. 이화여대에서는 김행자, 진민자, 숙대에서는 훗날 총장을 지낸 이경숙, 김말숙, 성대는 홍사임, 동국대는 백경남, 김정자, 유옥자가 팔을 걷어붙였다. 모두가 기라성 같은 맹장들이었다. 6.3의 주역들은 훗날 한국을 이끄는 리더들이 됐다.
-‘북한 방송’ 중계 사건
당시 학생들이 만날 곳이라곤 다방과 대폿집 밖에 없었다. 나는 남녀 학생회 간부들을 데리고 대폿집을 순례하며 그들과 울분을 토하고 한편으로는 격려해주었다. 그런데 모 신문에서 대학생들의 대폿집 출입 풍조를 우려하는 사설을 쓴 적도 있다.
전화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었다. 학생들 간의 연락은 인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광교 다방’에서 모임이 열렸다. 각 대학 대표들이 조직적인 시위활동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한참 시국과 정세를 논하며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데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모두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런데 우리가 채택한 성명서 내용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문교장관이던 윤천주가 나타나 한 문구를 문제 삼은 것이다. “친(親) 진보, 반(反) 보수”란 문구였다.
“이것들 빨갱이들 아냐!” 윤천주는 학생들을 좌익으로 몰아세웠다. 고려대 교수를 지낸 교육자란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을 빨갱이로 몬 것이다.
한일협정에 반대하던 학생들을 북한과 연계시키려는 박정희 정권의 흉계는 계속 됐다. 한번은 광화문 근처에서 있던 학생들의 시위 준비모임을 경찰이 급습했다. 경찰은 학생들을 버스에 싣고 중앙청 뒷뜰로 데려가 격리시켰다. 버스 안에 갇혀 있던 학생들 중 한 명이 당시로서는 흔치않던 휴대용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틀었는데 ‘북한 방송’이 나왔다. 그것도 그날 우리의 연행 현장을 중계하는 내용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진짜 북한 방송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에서 학생 시위를 북한과 연계시키려고 한 공작이었던 것 같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 안성혁이 얽혔다. 그가 어찌된 영문인지 일본을 다녀왔다고 귀국 보고모임을 가졌다. 외국에 나가기만 해도 ‘사꾸라’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일본에 가보니 북한 선전 책자가 많더라. 그 책자를 보니 선전용 트랙터가 한국 전체 트랙터 수보다 많아 보였다.”
안성혁은 북괴를 찬양했다 하여 끌려갔다. 그가 겪었을 고초가 짐작된다.
-외무부에서 걸려온 전화
6월3일, 1만여 명의 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박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했다. 서울에서만 3백84명이 반공법위반 등으로 구속됐다. 일본과 굴욕적 회담을 중단하고 민족 자존심을 지키려는 학생들의 요구를 ‘반공법’으로 막은 것이다. 박 정권의 강경조치에 시위는 진정됐다. 이듬해 외무부에서 의외의 연락이 왔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 좀 하고 오라.”는 것이다. 당시 장관은 이동원 씨였고 비서실에는 나중에 주미대사를 지낸 박건우, 이재춘 씨가 있었다. 이재춘 비서가 나의 출국을 도왔다. 공부는 안 하고 경찰서만 들락날락하는 맏아들을 못마땅하게 보시던 아버지도 미국행을 권하셨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 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 대사관에 갔더니 하비브 참사관(훗날 미 대사)이 보는데서 영사가 비자를 건네줬다. 1주일도 안 돼 미국 비자가 나온 것이다. 도미 명분은 뉴욕에서 열리는 국제자유청년연맹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미국행이 결정됐지만 기관의 감시와 압박은 풀리지 않았다. 출국 며칠 전 집으로 전화가 왔다. “외무부인데 꼭 와 달라.” “어디로 가면 되느냐?” “중앙청 몇 호실이다.”
경복궁 앞의 중앙청에 가 보니 그 방이 없었다. 미국에 가서도 까불지 말라는 경고였을까.
출국 하루 전에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른 아침에 사복 차림의 사내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서울 역 앞의 동자동에 있는 어떤 큰 한옥으로 나를 데려갔다. 연행이었다. 아침 9시에 그 집에 들어갔는데 오후 4시가 되도록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아무런 조사도 없이 하릴 없이 앉혀놓은 것이다. 다음 날 출국하는 사람을…. 다른 동료들을 선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다 떠나라는 협박으로 느껴졌다. 그게 25살의 청년 정기용이 대한민국에서 받은 마지막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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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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