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필부문 장려상
▶ 제24회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
내가 초등학교 6학년, 그러니까 1971년 여름 방학 중 어느 날, 벼르고 벼르다가 그날 친구와 난 청량리에 있던 메리아 펜팔 협회라는 곳을 가기로 했다. 그 시절도 조기 교육열 때문에 영어라는 걸 과외수업을 통해서 배우기 시작했기에 마치 우리가 영어를 잘 하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우리도 미국 친구라는 걸 만들어 서로 편지하며 지내자는 거였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는 지는 생각이 나지않지만 우리 둘 모두 동의 했었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 당시 ‘어깨동무’라는 학생 잡지에 난 광고를 찢어 주머니에 넣고 우린 집을 나섰다. 우리가 살던 곳은 구로동이라는 서울의 변두리였고, 친구 집까지는 걸어서15분 남짓 걸렸다. 엄마에겐 친구 집에 가서 논다고 하고 버스비만 달랑 갖고 집을 나섰다. 서로의 중간인 구로동 버스 종점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서 다시 청량리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두리번거리며, 이사람 저사람에게 길을 물으며 드디어 우린 부푼 가슴을 안고 펜팔 협회 문을 두드렸다. 주춤하며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아가씨에게 가서 광고를 내밀며 말했다.
-영문 펜팔하려고 왔는데요.
-영어 할 줄 아니?
-조금 할 줄 알아요.
-그럼, 집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니?
-아니요.
-나중에 더 크면 와.
-우리 영어 할 수 있어요. 광고에 초보자도 할 수 있다고 했는 데요.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안돼. 나중에 다시 와.
광고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알기엔 우린 너무 어렸던 것 같았다. 억울하고, 화나고, 기가 막힌 걸 참으며 우린 밖으로 나왔다. 터벅 터벅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서울역으로 우릴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차는 오지않고 사람들만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차를 기다리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사람들이 하는 대화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순간, ‘호외요’하는 소리에 귀가 갑자기 뚤렸다. 사람들이 웅성 대는 걸 느꼈고, 그들이 서서 신문을 읽고 있는 걸 알았다. 그들 말이 무장공비가 노량진 근처에 나타났단다. 노량진? 그건 우리집 가는 길인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털컥 내려않았다. 김일성이 서울에서 환갑잔치를 할 거라는 둥, 항상 우린 북한이 언젠가는 남침을 다시할 거라는 소릴 들으며 살아왔었다. 그 당시 내겐 무장공비 나타난 것이 전쟁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교통은 차단되어서 버스가 다닐 수 없단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친구와 난 버스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걷기로 했다. 우선 서울역으로 가기로했다. 어린 마음에도 서울역은 모든 것이 통하는 곳이기때문에 그 곳에 가면 뭔가 수가 생길 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다.
서울역에 도착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버스 정류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하기에 바빴고, 아무도 어린 우리들에게 신경을 써줄 사람은 없었다. 한참 후에 버스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른들 말이 제1한강교 (지금의 한강대교) 전 노량진까지만 운행한단다. 어른들이 하나둘씩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도 노량진 근처까지만이라도 가기로 결정했다. 일단 그곳에 가면 버스는 못가도 걸어 갈 수는 있으리라 싶었다. 어찌 어찌하며 버스에 겨우 승차를 했다. 이미 밖은 어두웠다. 평소에도 눈물이 많은 나는 차에 올라서도 찔끔찔끔 울었다. 내가 우느라 친구도 울었는 지 어쨋는 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한 언니가 우는 나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엄마한테 말도 안하고 왔는데 버스가 없어서 집에 못가요.
-어디 사는데?
-구로동이요.
-혹시 노량진 쯤 가면 버스는 안다녀도 택시는 다닐지도 몰라.
-택시요? 택시 탈 돈도 없는 데요?
그 언니는 자기 지갑을 열더니 돈을 꺼내주었다.
-이거면 택시 탈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갚아요?
-괜찮아. 안갚아도돼.
-꼭 갚을 께요. 어디로 찾아가면돼요?
-정 갚을려면, 노량진에 있는 독일빵집으로 와서 미스 리 찾아.
그리곤 그 언니는 우리보다 한 정거장쯤 먼저 내렸다. 우리가 노량진에 도착했을 땐 하나 둘씩 버스가 정상 운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우리집 가는 버스가 보였다. 친구와 나는 택시 생각은 잊어버리고 버스로 달려갔다. 그리고 우린 밤 늦게서야 집에 도착했다. 여느 때 처럼, 친구집에서 늦게 왔다고 난 엄마한테 무지무지하게 혼났다. 엄마는 감히 내가 서울의 다른 쪽에 있었으리란 상상도 못하셨고,아직까지도 난 한번도 그 때일을 말한 적이 없다. 그건 친구와 나의 진짜 비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난 독일 빵집에 가지 않았고, 그 돈을 갚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시 버스를 타고 혼자 어딜 간다는 게 두려웠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다 보니 새삼스럽게 찾아간다는 게 왠지 쑥스럽게 느껴졌고, 아직도 그 언니가 거기에 계속 다니고 있을까, 얼굴은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구차한 이유를 스스로 들이대고, 결국 난 그 독일 빵집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내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왜 난 용기가 없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난 먼 타향에 살고있고, 그나마 그 빵집 앞을 지나갈 기회조차 없어져 버렸다. 그리곤 수십년이 지난 몇 해 전에서야 그 날이 실미도 사건 날이었다는 걸 알았다.
이미 거의 반세기가 지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힘들게 사는 한 빵집 종업원이 차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선뜻 내준 그 때 그 고마움을 어찌 잊겠는가. 오늘도 난 꿈에서 나마 그 언니를 다시 만나기를 빌어본다.
<
김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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