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BS의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 나온 원로 철학자 김형석(100) 교수의 ‘곱게 늙은 모습’이 미주한인들 사이에도 회자되고 있다. 전혀 100세 노인 같지 않다. 연희동 자택의 언덕길을 걸어서 오르내리며 집에서도 계단을 걸어서 2층 서재에 오르내린다. 지하철을 즐겨 타고 다닌다. 지난 한해 대중강연을 160여 차례나 가졌고 베스트셀러도 두 권이나 썼다.
그 중 한권인 자서전 ‘100년을 살아보니…’를 지난 가을에 읽었다. 한 세기를 살며 일제강점기^6.25전쟁^군사독재^민주화운동^경제부흥의 전 과정에서 정제된 인생철학과 신앙간증이 담겨있다. 힘들었던 6남매의 교육, 20년간 투병한 부인이 별세한 후 10여년째 이어오는 독거생활의 이모저모를 털어놓고 “사랑이 있는 고생은 행복이었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김 교수는 올해 백세가 아니라 백수(白壽, 99세)다. 삼일운동 다음해인 1920년에 태어났으므로 내년(2020년)에 100세가 된다. 아무튼 그는 건강하게 늙어 ‘인생 100세 시대’가 헛말이 아님을 실증한 첫 저명인사이다. 그보다도 그가 살아온 지난 100년이 한민족에겐 사상 전무후무하리만큼 큰 격변기였다는 점이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그가 태중에 있었던 1919년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불붙었다. 삼일 만세운동이 3월1일 터졌고 그에 앞서 2월8일 도쿄에서 한국유학생 600여명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4월1일 유관순이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된데 이어 4월15일 수원 제암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주민들이 동네 감리교회에 감금돼 불에 타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국제적으로도 어수선했다.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에서 독립했고 아일랜드는 영국에 독립전쟁을 선포했다. 그해 첫날 독일 공산당이 창당됐고 4일 뒤 나치당이 창당됐다. 4월엔 모스크바에서 레닌, 트로츠키 등이 주도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당됐다. 8월엔 독일이 현대헌법의 모체로 불리는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했지만 훗날 히틀러에 의해 유명무실해졌다.
김 교수가 태어난 1920년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역시 3월1일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김좌진^이범석이 이끄는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뒀다. 그해 말 이승만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주석으로 취임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창간됐고, 미국에선 8월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돼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당시 코리아는 요즘 코모로(아프리카) 만큼이나 무명 국가였다. 일본 패망으로 독립한 후 40여년은 일제강점기보다 더 혹독한 고난의 시기였다. 동족상잔 전쟁을 치르며 세계최악의 극빈국가로 꼽혔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조롱을 들었다. 실제로 쿠데타를 두차례나 겪었다.
하지만 김 교수의 노년기였던 지난 40년간 한국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경제력에서도, 올림픽에서도 세계 10위권을 들락거리는 소강국이 됐다. 자동차도, TV도, 전화기도 한국제가 명품이다. 유대인과 중국인을 뺨칠 정도로 세계 어느 구석에나 한인 이민자들이 살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빌보드 차트 톱에 올랐다. 이제 코리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경을 헤치고 살아온 김 교수는 지금이 예전보다 살기 좋다고 말한다. 당연하다. 앞으로 더 잘살게 될 터이다. 하지만 그는 꼭 돈이 많아야 잘 사는 게 아니라며 돈보다 일을 사랑하라고 권면한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처럼 주위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좀 더 행복해지고, 좀 더 인간답게 살도록 돕는 것이 지고선”이라고 강조한다.
‘일 사랑하기’를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온 김 교수는 요즘도 강연을 위해 책을 읽고 원고를 쓴다고 했다. 책도 더 출간할 계획이란다. 죽기 전에 고향(평안남도 대동)을 찾아가볼 꿈을 꿀 지도 모른다. 김 교수처럼 상전벽해의 한 세기를 산 센테네어리언들이 점점 많아질 터이다. 올해 태어나는 아기들이 100년 후 2119년에 어떤 세상에서 살지 상상조차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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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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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고 환경 좋고 자신을 절제할수 있는 지성인 이면 저리 살수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