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만약 선택의 권한이 있었다면, 지금쯤 아마 한국같은 곳에서 (점원 두어명 거느린 그런 곳에서 음악 빵빵하게 틀어놓고… ) 아담한 책방같은 것을 경영하고 있었을 것 같다. 물론 그 곳에서 책을 많이 읽는다든지 아니면 책을 파는 일에 수완을 발휘하여 돈을 많이 벌수 있을 거란 생각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핑계에 불과하고 그곳에서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그런 속셈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책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책은 왠지 누구나 읽어야한다는 그런 의무감이 있는 분야인 것도 사실이다. 음악은 그럴 필요가 없는 장르 중의 하나이다. 음악과 가까이 한다고해서 누가 알아 주는 것도 아니요 또 음악을 멀리한다고해서 누가 흉보는 일도 없다. 일종의 (삶의) 옵션으로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무방인 존재가 바로 음악이란 장르이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음악을 위해 한 일은 지금껏 아무 것도 없다. 남들처럼 기타를 배운다든지 아니면 피아노를 배운다든지 하는 그런 것도 없었고 또 그러고 싶은 생각 조차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좋아한다고 내세우고 있는 내 자신이 때로는 조금 주제넘다는 생각이 들곤하지만 그래서 더욱 (음악에 대해) 미안할 때가 많다. 마치 받기만 할 뿐 주지 못하는 그런 마음 같은 것이라고나할까. 내가 음악 칼럼을 시작한 것도 사실은 그러한 음악과의 갭을 해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또 음악을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 한, 회한같은 것이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할 것이다. 왜 그랬을까? 전공과는 상관없이 그저 음악을 연주하고 또 음악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살아 갈 수 있는 방법도 많았을텐데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자존심이나 고집… 환경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보다는 무언가 미완성으로 남겨질 수 밖에 없는 숱한 것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즉 무언가를 집착하고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좌절과 절망… 그러한 것이 두렵고 겁났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음악만큼은 인생의 숱한 절망과 좌절들… 그런 것들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고나할까.
지난 연말에는 일본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金閣寺)’라는 소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시 등 이런저런 음악들을 들으면서 지냈다. ‘금각사’는 어느 승려 지망생이 미학적인 환각에 휩싸여 금각에 불을 지르는 내용을 그리고 있는데 금각을 사랑한 나머지 금각을 불지른다는, 좀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지나친 자기 몰입이라고나할까, 칼날처럼 예리한 모습이 조금 질리게 하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미학이란 무엇인가, 인생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반문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했다. 금각사는 미학적인 문체의 소설들이 그렇듯, 성적인 관념과 미적인 관념을 교묘하게 대비시키고 있는데 금각사 안의 금각이라는 정자를 대상으로 ‘아름다움이란 변화하고 흘러간다’는 것을 깨닫고 불을 지르면서 그 미적인 완성을 실현해 낸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미조구치는 못생긴데다가 말까지 더듬어서 그의 구애 작전은 늘 비참한 실패로 끝나곤 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맘에 드는 여학생이라해도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애틋한 로맨스는 희극이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미조구치에게 있어서 금각은 그 절망을 원수갚고 위로해 주는 유일한 美的인 대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폭격에 시달리던 금각이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하자 (위축된) 미조구치의 미의 균형은 결국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 금각은1397년 쇼군의 별장의 지어졌던 정자인데 바닥을 제외하고 모두 금박으로 덮여있어 금각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1950년 화재로 전소된 적이 있었는데 소설 ‘금각사’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쓴 작품이었다. 탐미주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로 일약 유명하게 되었지만 소설의 내용처럼 45세에 스스로를 불태워(할복 자살), 전 일본을 충격으로 휩싸이게 했다.
예술가란 마치 무언가를 좋아하면서도 그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미학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인생에 대해서는 늘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절망의 존재들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금각은 있다. 미시마 유키오에게는 그것이 삶 속으로 산화해 간 열정이었듯 금각은 어쩌면 끝없는 어둠 속으로의 잠적… 음악가의 비창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답다고하여 모두가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밤에 내리는 찰라의 눈(雪) … 어둠 속의 미완성이 때론 더욱 강렬하듯, 금각이란 어쩌면 그 순수한 반대쪽… 해답과는 관계 없이, 금각처럼 찬란하지만 다가갈 수록 사라져 가는, 그 풍요로운 미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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