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에 즐기는 따뜻한 와인‘뱅쇼’, 귀한 향신료 필요해 보이지만, 수정과 재료와 다르지 않아
▶ 알콜을 싫어하는 사람은 ‘핫 초콜릿 믹스’를 호로록
뱅쇼는 계피와 팔각, 정향 등 각종 겨울 향신료를 넣어 만든다. <이용재 제공>
마른 재료뿐 아니라 생 식재료인 생강을 잘라 넣으면 향과 맛을 동시에 살릴 수 있다. <이용재 제공>
“삼촌은 계피 뭐에다 쓰게?”시장 초입의 ‘제기동 평양냉면’에서 물냉면과 빈대떡을 먹고 내려와, 바로 눈 앞에 띄는 매대에서 계피 더미의 가격을 물었다. 맨 바깥껍질까지 붙어 있는 생판 나무 껍데기였다. “와인 좀 끓이려고요. 그 김에 수정과도 만들까 싶고요.”
정말 오랜만에 청량리 종합시장을 들렀다. 6,7년 전에는 매주 이곳에 찾아왔다. 그야말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서구에서 내부순환을 타고 가 시장을 돌며 눈에 띄는 식재료를 사다 먹었다. 그러기를 1년 여, 흙바닥의 좁은 통행로나 주차 공간 등의 편의시설 부족에 피로함을 느끼고 물건의 품질에도 신뢰를 잃어 접었었다.
매주 고민한다. 식재료에 관한 연재이니 음식에 비유하자면 매주 한 번씩 여는 친목 모임의 메뉴를 준비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최대한 일상적인 식재료를 다양한 음식의 맥락에 실어 전달한다. 재료가 빛나되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한 번쯤 시도해 볼까?’라는 동기도 불어 넣을 수 있으면 더 좋다. 마지막으로 느슨하게나마 분위기 파악도 해야 한다. 철이나 시기 말이다. 장보기 계획을 세울 때 번거롭지 않으면서도 뭔가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식재료와 음식이 없을까.
겨울 향신료 넣은 뱅쇼 계피를 비롯한 겨울 향신료와 더불어 ‘뱅쇼(Vin Chaud)’ 생각이 바로 났다. 프랑스어로 뜨거운 와인을 뜻하는 뱅쇼는 유럽 전역에서 즐기는 겨울 음료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글뤼바인(Gluhwein)’, 노르웨이 등의 북유럽 국가에서는 ‘글뢱(Gløgg 또는 glogg)’ 등으로 불린다. 생각난 김에 경동시장을 찾았다.
뱅쇼는 외국 음식이니 백화점 식품 코너 등의 진열장에 가지런히 예쁘게 놓인 향신료 병이나 찾아야 끓인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 재료는 비슷하거나 다른 이름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곁 약재상에 있었다. 계피와 팔각, 정향이 그렇고 뱅쇼에는 필요하지 않지만 베샤멜 소스 등에 그야말로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너트멕도 한약방에서 ‘육두구’로 살 수 있다. 맥락이 달라서 그런지 가격 차이도 크다. 시장에서는 뭉텅이로 싸게 팔고 백화점에서는 조금씩 비싸게 판다.
사실 나는 이미 모든 재료를 갖추고 있다. 찬장에 각종 향신료를 틈틈이 사모아 쓴 지 10년도 넘었다. 향신료만큼 같은 음식에 다른 느낌을 불어 넣는 식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뒤져 보니 서로 다른 상표의 계피를 세 가지나 이미 가지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슈퍼마켓이나 향신료 전문점에서 사 모은 것들이다. 여기에 두 가지를 더 사왔으니 계피만 이제 다섯 종류이다. 모두 같지는 않지만 또한 너무 다르지도 않다. 무슨 말인가. 계피의 세계는 크게 둘로 갈린다. 언제나 헛갈리기에 기억을 완벽하게 못하고 참고자료를 뒤져 보면서 다시 상기한다. 그만큼 헛갈린다는 말이다.
먼저 우리에게 수정과 재료로 친숙한 계피는 ‘카시아 계피(Cassia Cinnamon)’이다. 껍질 자체가 두껍고 색도 조금 더 진해 짙은 붉은색을 띄며 향도 더 강하다. 특히 우리가 계피의 특성으로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는 맵고도 알싸한 향을 지닌다. 투박하다 싶은 나무 껍질만 몇 묶음 사려는데 여성 판매자가 ‘더 좋은 계피가 있는데, 정향도 필요하겠고…’라며 안쪽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고 온다. 맨 바깥쪽의 나무 껍질은 벗겨 내고 없는, 좀 더 손질된 계피로 포장에는 ‘시가 계피’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두께로 보건대 가공만 다르게 한 카시아 계피이다. 껍질이 돌돌 말려 있어 ‘시가 계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양인데, 사실 진짜 시가를 닮은 계피는 따로 있다.
두 번째 계피는 ‘실론 계피(Ceylon Cinnamon)’이다. 종잇장에 비유해도 될 만큼 껍질이 얇아 돌돌 말린 형국이 정말 시가, 즉 엽궐련과 닮았다. 이런 생김새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지만 다른 특징도 조금씩 다르다. 카시아 계피에 비해 색이 옅으며 향은 좀 더 부드러운 가운데 달콤하다. 그래서 ‘실론 계피가 진짜다’라는 이야기도 많이 돈다. 다섯 가지 계피를 모두 꺼내 놓고 보니 실론 계피는 미국의 향신료 전문점에서 산 것 하나뿐이었다.
계피의 세계가 이렇지만 뱅쇼와는 사실 별 관련이 없다. ‘끓이는 김에 한 번 알아보자’는 마음으로 소개할 뿐이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미국과 달리 뱅쇼의 재료로서 계피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프랑스에 머물며 요리하는 미국인 셰프 데이비드 리보비츠(블로그로 활발히 활동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요리책이 소개된 바 있다)는 ‘프랑스는 미국만큼 계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다른 향신료로 끓인 레시피를 소개한다.
뱅쇼의 핵심 향신료는 팔각과 정향 그렇다면 다른 향신료는 무엇인가. 일단 뱅쇼에 빠지지 않는 두 가지가 있는데, 팔각과 정향이다. 팔각은 이름처럼 여덟 개의 꼭지점이 있는 별 모양의 열매로 오향장육 같은 중식, 혹은 포 같은 베트남 국물 음식의 핵심 향신료이다. 써 보니 다른 향신료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어 찬장에 함께 두지 않는다.
정향(혹은 클로브)은 꽃봉오리로, 핀 혹은 못과 흡사하게 생겨 재료에 박아 넣어 향을 불어 넣는다. 서양의 크리스마스 주요리 가운데 하나인 햄 구이도 전체에 걸쳐 대각선으로 칼집을 넣고 다이아몬드 문양의 한 가운데에 정향을 박아 맛과 장식적인 효과를 한꺼번에 잡는다. 여기에 애플파이에 향을 보태는 카르다몸을 추가하면 계피에 의존하지 않아도 뱅쇼를 끓일 수 있다. 셋 다 계피에 비하면 달콤함은 적은 가운데 표정이 확연히 다른 강렬함을 지녀 뱅쇼의 뒷자락에 복합적인 향을 불어 넣을 수 있다. 모두 시장이나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 그도 아니라면 인터넷 오픈 마켓에서 살 수 있는 향신료이다.
장기 보관이 가능한 마른 재료만으로도 뱅쇼를 얼마든지 끓일 수 있는 가운데, 냉장고에 둘 가능성이 높은 생식재료 한두 가지를 더 첨가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생강이다. 나붓하게 한두 쪽 썰어 넣는다. 두 번째는 오렌지 껍질이다. 요즘은 미국과 호주산을 넘어 칠레 등에서도 오렌지가 수입된다. 따라서 과육도 아닌 껍질쯤이야 큰 어려움 없이 찾아 쓸 수 있다. 한 줄 정도 넣거나, 아예 과육과 함께 통째로 썰어 끓여도 좋다. 생강이야 늘 냉장고에 있으니 나는 오렌지 껍질을 말린 것으로 대체해 티백과 드립 커피팩 같은 ‘뱅쇼 키트’를 만들어 둔다. 지금까지 살펴본 계피, 팔각, 정향, 카르다몸에 말려 굵게 간 말린 오렌지 껍질까지 마트에서 파는 ‘다시백’에 담아 둔다. 뱅쇼 생각날 때 찬장을 뒤지고 향신료 병을 이것저것 뒤져 재료를 수합하는 번거로움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다.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친환경 생분해 제품에 담으면 뱅쇼를 끓이고 환경 걱정 없이 그대로 버릴 수 있어 더 좋다.
뱅쇼의 몸통인 와인 그런데 향신료만 갖춘다고 뱅쇼를 끓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맞다, 당연히 ‘몸통’인 와인이 필요하다. 뱅쇼를 포함해 요리에 곁다리로 쓰는 와인을 놓고는 늘 두 가지의 주장이 충돌한다. ‘그대로 마실 수 없을 만큼 맛이 없는 것은 쓰지 않는다’와 ‘아니다, 최대한 싼 걸 써도 상관 없다’이다. 맥락에 따라 둘 다 맞는 말인데, 와인이 생산되지 않는 한국이라면 전자의 울림이 좀 더 크다. 때로 싸고, 그렇기 때문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없는 와인도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맛없는 와인으로 만들면 맛이 없고 그렇다고 비싼 와인으로 만들기는 아깝다. 그렇다면 절충안은 없을까. 물론 있다. 소위 ‘데일리 와인’이라 불리는, 대형할인점 등에서 파는 매일 마셔도 부담 없는 가격대의 레드 와인이나 그보다 조금 높은 가격대의 와인을 고른다.
딴 날 무리하지 않고 편하게 마신 뒤, 다음 날 남는 걸로 뱅쇼를 끓이면 딱 좋다. 풀어진 와인에 향신료로 새 활기를 불어 넣는다고 여기면 마음도 편하다. 굳이 품종이나 지역을 특정하지 않고도 ‘웬만한 레드 와인’이면 충분한데, 다만 끓이면 탄닌의 쓴맛이 도드라질 수 있으므로 오크통에 지나치게 오래 숙성시키지 않은, 어리면서 과일향이 두드러지는 제품이 좋다. 흔하디 흔한 레드 와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와인까지 비로소 재료를 다 갖추었다면 냄비에 담아 중불에 올린다. 레드와인 한병(750㎖)을 기준으로 계피, 카르다몸과 정향, 팔각을 각각 한두 쪽씩 넣으면 충분하다. 입맛에 따라 설탕이나 꿀 약간으로 단맛을 더해도 좋다. 끓을락말락 할 때 약불로 줄여 30분 정도 두었다가 불을 끄고 15분 정도 냄비 뚜껑을 덮은 채로 둬 향을 충분히 우려낸다. 와인이 식었다 싶으면 불을 켜 조금 더 데워 잔에 담아 낸다. 얇고 비싼 것보다 열에 잘 견디는, 싸고 두툼한 와인잔이나 머그컵 등이 좋다.
오랜만에 들른 시장은 보도와 지붕을 깔끔하게 정비한 상태였다. 덕분에 오가며 물건 들여다보고 사기가 한결 편해졌다. 연근과 마, 두 뿌리채소만 심지 굳게 파는 아저씨와 매대도 건재했다. 사고 싶은 식재료가 너무 많았지만 출장을 앞둔 길이라 일단은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꼭 시간을 내 다시 찾을 것이다. 시장과 화해한 셈인데, 그런 김에 올해는 몇 년 만에 ‘뱅쇼 키트’나 만들어서 주변 이들에게 간단한 연말 선물 겸 보내야겠다. 각자 좋아하는 레드 와인 한 병씩 사서 뱅쇼를 끓이라고. 나는 냄비 두 점을 올려 놓을 계획이다. 수정과를 위해 좀 큰 것 한 점, 뱅쇼를 위해 작은 것 한 점 해서 두 점이다. 작은 냄비의 술이 빨리 끓을 테니 뱅쇼를 끓여 마시면서 수정과를 저으면 딱 좋을 것이다.
뱅쇼의 대안이 될 핫 초콜릿 믹스 신나게 원고를 써 내려가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모두가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성년자이거나 혹은 알코올 섭취가 건강을 위협하는 독자에게는 이 긴 글이 전혀 쓸모가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따라서 뱅쇼의 대안이 될 핫 초콜릿 믹스 레시피를 소개한다. 기성품도 많지만 사실 뱅쇼보다도 더 만들기가 간단할뿐더러 유효기간 걱정 없이 두고 타 마실 수 있다. 플라스틱 혹은 유리 밀폐용기에 설탕 70g, 코코아가루 20g, 전지분유 55g, 소금 ¼ 작은 술, 옥수수전분 1 작은 술을 담아 뚜껑을 덮고 흔들어 잘 섞는다. 끝이다. 믹스 25g(세 큰 술)을 머그에 담고 끓은 물 1컵을 부은 뒤 잘 저어 녹인다. 3,4분쯤 식혔다가 마신다. 가루설탕을 쓰면 물에 훨씬 잘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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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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