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을 전후해 한국인들이 워싱턴을 비롯한 미 전국의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70년에 1만1,549명으로 1만 명 이민시대가 열리더니만 73년 2만8,523명, 74년에는 3만4,526명이 태평양을 건넜다. 77년에는 3만5,592명으로 정점을 찍으며 매년 3만 명 규모가 미국을 찾았다. 그 중 워싱턴 지역으로 이민 온 한국인들은 초기에는 수도권메릴랜드 지역에 많이 거주했다. 그러다 90년을 경계로 버지니아의 비중이 더 커졌다. 한인 인구가 늘면서 애난데일을 필두로 센터빌과 엘리콧시티라는 제2의 한인 타운이 생겨났으며 2010년대 들어서는 또 다른 변화상을 겪고 있다. 지난 50년 이래 한인 타운의 변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1970년대: 첫 한인 공동체, 켄트촌
워싱턴 지역의 첫 한인 공동체는 메릴랜드 랜도버에 위치한 켄트 빌리지(Kent Village Apt)다. 이 한인촌은 70년 초 백남원 씨가 자리 잡으면서부터 형성돼 한때 130가구에 6백여 명이나 될 정도였다.
켄트 친목회가 발족하면서 1973년 11월17일 첫 계몽강연회를 열었는데 의사인 문영호가 의료혜택, 신대식 목사가 미 법률상식, 계창호 회계사가 세금, 투자 상식을 강의하였다. 이것이 워싱턴에서 처음 열린 이민생활 정착 세미나였다.
한인들은 3.1절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학교 강당을 빌어 이웃 동네 한인들도 초청, 약 700명이 기념식을 갖고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74년에는 태극기를 60장 만들어 집집마다 돌려 광복절 아침에 한인 가정마다 태극기가 게양되는 일도 있었다. 켄트촌은 한인들이 점차 내 집을 마련, 하나둘 떠나면서 80년대 중반부터 그 명맥이 사라졌다.
켄트촌의 인근 랜도버 몰 근처에도 70년대 초기 이민자 대기소 역할을 하던 켄트우드 아파트가 있었다.
-1970년대: 버지니아와 알링턴 시대
버지니아도 D.C.에서 가까운 지역부터 한인 거주지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북 버지니아는 메릴랜드의 켄트촌처럼 집단 거주지는 없었다. 70년대 초반 알링턴 타워 아파트, 포트 마이어 육군기지 옆 아파트, 훠어링턴 아파트 단지, 폴스 처치의 콜모어 아파트, 50번 도로가의 제퍼슨 빌리지 등 알링턴 일대의 아파트에 비교적 한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 지역이 선호된 것은 렌트비가 싸고 한인들의 직장이 있는 D.C.에서 가깝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당시 훠어링턴 아파트에서는 누가 집을 못 찾아 주차장에서 한국말로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여기저기서 내다볼 정도로 많은 한인들이 살았다.
알렉산드리아의 루트 1 주변에는 국제 결혼한 여성들이 많았다. 페어팩스 등지에는 한인들이 거의 없을 때였다.
-1980년대: 정부 아파트
메릴랜드 한인들이 80년대 들어 이사 간 지역은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의 어퍼 말보로, 렌함, 그린벨트 등이다. 당시 PG 카운티가 지역개발을 위해 저렴한 주택을 많이 짓게 한 것이 한인들이 집을 구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른바 ‘정부아파트’에도 많은 한인들이 살았다. 몽고메리 카운티의 위튼과 락빌에 걸쳐 있던 락크릭 테라스(Rock Creek Terrace) 아파트가 대표적이었다.
85년에는 전체 524가구 중 한인만 106세대에 500명까지 늘었다. 이처럼 급격히 증가한데는 렌트비가 시중가보다 200달러가량이 싸다고 소문이 난데다 육군 월터리드 병원에 근무한 군인 송주섭이 총 160가정의 입주를 도운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한인들이 늘며 81년경에는 한인 입주자 친목회도 결성, 렌트비 인상을 저지시키고 영어 강습등 활동을 했다. 추석과 단오잔치도 네 차례나 열었다. 87년 마지막 잔치 때는 347명이 모여 즐겼으나 이후 점점 줄어들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한인들은 메릴랜드의 포토맥, 락빌, 게이더스버그 등지로 흩어졌다.
-1980년대: 외곽으로 이동하다
D.C.의 흑인촌 화는 백인사회와 한인들의 교외 이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을 전후해 흑인들이 몰려오면서 도시는 슬럼화 돼갔다. 그러자 백인들은 떠나고 공무원들도 인근 버지니아, 메릴랜드로 거처를 옮겼다.
백인들의 뒤를 한인들도 따랐다. 80년대 들어 상당 수 한인들이 애난데일, 페어팩스, 스프링필드, 버크 등지로 이사했다. 저렴한 집값과 자녀교육 및 주거환경을 고려한 것이었다.
-애난데일 시대 열리다
애난데일은 2차 대전 이후 교외 주거지역으로 개발됐으나 후미진 동네였다. 80년대 워싱턴 일원의 개발붐을 타고 이 지역에 에버그린 콘도미니엄이 들어섰다.
폴스 처치의 베이리 크로스 로드 선상의 로 빌딩에 입주해 있던 워싱톤 한인회가 88년 8월 이곳으로 새 회관을 마련해 터전을 옮기자 같은 빌딩의 여러 한인 사무실도 덩달아 이전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보험, 융자, 의료원, 여행사, 방송국 등 서비스 업종이 주로 입주했다.
94년 초 이 타운의 55개 사무실 중 한인업소가 절반이 넘은 27개를 차지할 정도로 급속한 한인 상업지구로 바뀌었다. 이 시기 문을 연 한인식당만 10개가 넘을 정도로 애난데일은 본격적으로 한인 타운으로 변해갔다. 생업이 있는 D.C.와 가까운데다 495번 벨트웨이 및 395번 국도에 인접했다는 지리적 이점이 한인상가들이 몰리는 한 요인이 됐다.
애난데일은 주거지역으로도 기능했다. 패트리엇 빌리지(Patriot Village)는 초기 이민자들이 거쳐 가는 대표적인 아파트다. 2000년 초반까지 1백여 한인 가구가 살았다. 아파트 곳곳에서는 김치찌개 냄새가 새어나오고 여기저기서 한국말로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2000년 이후 라틴계 이민자들이 몰리면서 한인들은 점차 이 지역을 빠져나오고 있다.
-1990년대: 애난데일의 번성
90년대 말부터 애난데일의 한인 타운 화는 본격화됐다. 애난데일을 관통하는 236번 도로 좌우에는 큼지막한 한글 간판이 여기저기서 돌출한다. 이 작은 지역에 들어선 전체 한인업소는 3백 개가 넘었다.
1999년 5월16일 워싱턴 포스트 지도 “미국의 수도 워싱턴 지역에 본격적으로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고 있다”고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은 “워싱턴 지역의 한인 수는 대략 10만 명. 이 가운데 약 5만 명이 코리아타운 주변의 페어팩스 카운티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코리아타운은 바로 이 같은 ‘한국인' 수요를 기반으로 형성되기 시작, 점차 지역상권의 중심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적었다.
1990년과 2000년 센서스를 비교하면 애난데일은 1천504명에서 3천651명으로 3배가량이나 한인 인구가 늘었다. 이 지역 전체 인구 중 6.6%를 차지하는 수치다.
이렇게 성장한 한인사회는 2003년 10월25일, 애난데일의 메이슨 디스트릭 파크에서 약 3천명의 한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첫 한인의 날 축제를 열기도 했다. 현재 코러스 축제의 시발이다.
-2000년대: 센터빌의 부상
센터빌은 1990년 한인 인구가 378명에서 10년 뒤인 2000년에는 2천028명으로 무려 436%가 증가했다. 페어팩스의 외곽지대인 센터빌과 인근 샌틸리 지역의 폭발적인 한인 인구 증가는 90년대 들어 이 지역에 신규 주택과 타운 하우스 단지가 대규모로 개발돼 한인이 선호하는 새 집이 많아졌고 버크나 스프링필드 등 기존의 페어팩스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주택가격이 낮은 게 주 요인으로 분석된다.
2000년대 들어 센터빌은 제2의 한인 타운화 될 정도로 한인 인구와 상권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2002년 11월 동양식품점 그랜드 마트(현 롯데 플라자 자리)의 오픈은 제2의 한인 타운 화를 촉진했다.
그랜드마트측은 이어 28번 도로 건너편의 올드 센터빌 크로싱 사핑센터를 매입했으며 3층 규모의 오피스 콘도를 신축, 한인 등에 분양했다. 현재 H 마트와 찜질방 스파월드 등이 입주한 이 샤핑센터는 매일 한인들로 붐빈다.
-2000년대: 메릴랜드 엘리콧 시티의 번성
버지니아가 애난데일과 센터빌을 중심으로 한인타운이 활성화되는데 비해 메릴랜드에는 이상하리만치 한인 타운이 형성되지 않았다. 실버스프링과 락빌 인근에 한인 식당과 상가들이 있지만 밀집형을 이루지 못하고 분산돼 있는 상태였다.
메릴랜드 지역에 2000년대 들어 한인 타운으로 부상한 게 볼티모어 남쪽에 위치한 엘리콧 시티다. 하워드 카운티인 이 지역에 한인상권이 형성된 것은 1999년 롯데플라자가 40번 도로 선상 샤핑센터에 문을 열면서부터. 이어 2001년 8월 케이톤스빌에 한아름 동양식품점이 개업하고, 40번 도로 서쪽 베다니 40샤핑센터 등에 한인업소들의 입주가 늘어나면서 40번 도로의 한인 상권은 동쪽으로는 롤링로드에서 서쪽으로는 베다니 레인 너머까지 6.7마일 구간으로 확대됐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에서 교육형 이민자들이 엘리콧 시티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좋은 학군, 볼티모어 시와 워싱턴 DC 모두에 가까운 지리적 이점, 안전한 주거 환경 등이 그 이유다.
2015년 CNN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산하고 볼거리가 없었던 메릴랜드 주의 한 지방도시가 한인들로 인해 다시금 활력을 되찾게 됐으며 서울의 교외를 방불케 하는 신흥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현재 엘리콧시티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규모는 하워드 카운티의 전체 인구 약 6만6천명의 7%로 추산된다.
-2010년대: 달라지는 한인 타운
2010년대 들어 한인 타운의 두드러진 변화상은 워싱턴 최대의 교회인 와싱톤한인중앙장로교회의 센터빌로의 이전이다. 이를 계기로 애난데일의 주말 상권은 점차 시들해지는데 비해 센터빌은 활력이 넘쳐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한국 프랜차이즈 업소의 확장과 미 주류사회 고객을 겨냥한 한인 업소들이 번성한다는 점이다.
뚜레주르와 파리 바게트, 신라제과 등 한국 빵집과 본촌, 충만치킨, BBQ 등 한국 프랜차이즈 업소들이 한인타운을 중심으로 상륙해 성업 중이다. 이와 함께 꿀돼지, 철기시대, 고기야 등 바비큐 전문점들이 주류사회 고객들에게 음식한류를 불러일으키며 한인 타운의 새로운 모습을 선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민 1세대 중심이던 한인 타운은 이제 1.5세와 젊은 세대들이 주역으로 등장했다. 1969년 아메리칸 대를 다닌 박규훈 전 워싱턴한인회장은 “70년 무렵만 해도 DC에 진이네를 시작으로 서라벌, 파라다이스 등 식당이 한국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전부였는데 이제는 서점과 개고기 집 빼고는 다 있을 정도로 무섭게 변했다”며 “한인 타운은 이제 한인들만의 공간이 아닌, 미국인들이 독특한 한국문화를 만나고 이해하는 복합공간으로 변모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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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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