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로녹 대학의 전경(위). 아랫줄 왼쪽부터 의친왕, 김규식 박사, 서광범.
워싱턴에서 66번 웨스트와 81번 사우스를 타고 4시간가량 달리면 세일럼(Salem)이란 소도시와 만난다. 버지니아의 남서부에 위치한 인구 2만5천 명의 마을이다. 이 곳에는 학생 수 2천 명의 작은 대학이 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1842년 설립된 유서 깊은 로녹 대학(Roanoke College)이다.
의친왕·김규식·송헌주·서광범·이기종 등
1893년부터 1920년대까지 30여명 유학
#머나먼 유학길
이 대학이 특별한 것은 한국과의 남다른 인연 때문이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많은 젊은 청년들이 이 대학에 유학을 왔다. 그리고 그들은 독립운동가로 걸출한 족적을 남겼다.
로녹 대학 출신으로 대표적인 인물은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이강)과 우사(尤史) 김규식 박사, 미주 한인독립운동의 지도자 송헌주, 갑신정변의 주역 서광범, 헤이그 밀사의 한 명인 이위종의 형 이기종 등이다.
은자의 왕국,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은 왜 태평양을 건너 1만 마일이 넘는 머나먼 미국의 시골 대학에 온 것일까.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맞지 않았던 그 시절에 동방의 유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대학생활을 보냈을까.
#1893년 서규병이 첫 유학
로녹 대학에 조선의 유학생들이 온 건 1890년대부터다. 최초의 조선 유학생은 1893년 입학한 서규병이다. 1893년이면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발발 1년 전이다. 서규병은 1898년 졸업 후 귀국해 인천부윤을 지내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중국에 망명했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광범, 서재필과 일가로 고 김영옥 대령의 부인이 그의 손녀다.
그가 외롭게 고학하고 있던 무렵, 조선은 풍전등화의 운명이었다. 서구 문물을 익혀 조선의 개화를 꿈꾸던 우국의 청년들은 미국 유학을 결행했다. 박희병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일본 게이오 의숙에서 수학한 박희병은 1896년 의친왕 이강과 함께 도미했다. 이강이 오하이오 주로 가자 그는 버지니아의 로녹 대학으로 와 2년간 예과(Sub-Freshman Course)를 다녔다.
1899년 귀국한 그는 평안도 운산 금광에서 통역 겸 영미 관계 외교 교섭관으로 일하면서 평북 선천에 신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다 36세에 병사를 하고 말았다. 미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그의 조카다.
#김규식, 우등 졸업하다
1897년 로녹 대학에는 박희병과 함께 이희철이 다녔고 10대 소년 김규식이 입학했다. 그해 가을학기에 16살의 김규식은 고교과정과 비슷한 예과에 들었다. 이듬해 봄 학기의 성적은 영어 92점, 라틴어 91점과 96점, 역사 94점, 수학이 97.7점이었다. 미국 유학 1년 만에 발군의 성적을 보인 김규식은 1898년 졸업 후 바로 학부 1학년에 입학했다. 그리고 1903년, 전체 졸업생 가운데 3등으로 졸업하게 된다.
김규식은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신문배달원, 웨이터, 접시닦이, 요리사, 부자 소유 요트의 집사, 극작가의 개인비서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자서전에서 적었다.
졸업 이듬해 귀국한 우사는 파리 강화회의 대표, 한국광복동지회 대표, 구미위원부 위원장, 임시정부 부주석, 김구 선생과 분단을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진력하다 6.25 사변 중 납북돼 타계했다.
#조선 유학생들이 온 이유
이들 외에도 갑신정변의 주역인 서광범이 1897년에 명예석사학위(M.A. Honoris Causa)를 받았다. 또 1893년 세계 콜럼비아 박람회에서 조선어 통역관으로 활약한 서평규, 프린스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구미위원부 위원과 재미한민족연합위원회 지도부였던 송헌주 등 1920년대까지 30여 명의 한인들이 이 대학에서 유학을 했다.
헤이그 밀사였던 이위종의 형인 이기종도 이 대학 출신이다. 그는 주미 공사와 주 러시아 공사를 지낸 이범진의 아들로 외교관을 지냈으며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객사하고 말았다.
당시 로녹 대학은 전체 학생 수가 181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문과대학이었다.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이 이 대학에 대거 유학을 온 사연은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언더우드 목사와 서재필 박사가 알선을 해주었다는 설이 있다. 또 이 대학의 드레허(Dreher) 학장이 조선의 처지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워싱턴 주미 공사관과 협력해 유학생들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수행원 데리고 유학온 의친왕
로녹 대학과 조선과의 특별한 인연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조선의 왕자였던 의친왕 이강(李堈)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이강은 도미 후 오하이오에서 2년을 보낸 후 1901년 3월 로녹 대학으로 와 수학했다. 2명의 수행원을 데리고서였다. 조선의 왕자가 유학 왔다 해서 사교계의 화제를 모았던 이강 공은 유학생이었던 김규식과도 남다른 친분을 맺는다.
그가 재학 중,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는 자신의 아들 이은을 왕위 계승자로 삼으려는 속셈에 신태무를 워싱턴 주미공사 대리로 보내 이강 공을 감시하게 한 일화도 있다.
귀국한 의친왕은 3.1운동에 이어 2차 만세시위를 위한 독립선언서에 조선 왕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또 1921년 워싱턴 5대 열강회의에 제출한 조선의 독립을 촉구한 건의서에서도 황족대표로 서명했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받다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체포돼 송환된 후에도 일본과 협력하지 않았다.
#원주와 로녹의 자매결연
조선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배출한 로녹 대학과 조선의 남다른 인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어진다. 1965년 로녹 카운티와 강원도 원주시가 자매결연을 한 이래 서로 교류하고 있다. 로녹에는 ‘원주로’가, 원주시에는 ‘로녹로’로 명명된 도로가 들어섰다.
또 로녹 대학의 홈페이지에는 조선의 첫 유학생 서규병의 흑백 사진을 싣고 125년이 넘는 그 특별한 인연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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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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